▲애국지사 신규식 선생 묘에서 바라본 친일파들 무덤. 사진 속 좌측 상단에 소나무 사이 비어있는 언덕이 제2장군 묘역이다.
김종훈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공인한 친일파 중 7인은 국립서울현충원에, 나머지 4인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친일파 7인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의 무덤 위치를 확인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인사 대부분이 일제시대 만주군으로 복무하며 독립군을 잡는 일을 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서 다시 군인이 돼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장성이 되었고 각군의 사령관과 국방부장관, 국방부 차관을 역임했다.
일본군 장교로 활약하다 국립서울현충원 제2장군묘역에 묻힌 신태영과 이응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묘역과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안장됐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친일파의 묘가 애국지사 묘역보다 더 높은 곳에서 굽어보고 있는 형태다.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 역시 두 사람의 묘역 입구 하단부에 있다.
친일파 신태영은 1914년 일본군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한 뒤 일본 나고야의 제3사단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했다. 1934년 대전중학교 군사교관을 거쳐 1942년 7월에는 용산정차장 사령관으로 병참 보급 업무를 수행했다. 1944년 4월부터 해주 육군병사부 과장으로 일제 강점기 전시체제 병력동원 업무를 담당했다. 30여 년 동안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일제 침략전쟁에 참전했다. 해방 후엔 육군중장과 대한민국 4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친일파 이응준도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장교로 30년 이상 복무하면서 시베리아 간섭전쟁과 1920년대 중국 침략 전쟁 등에 참전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전선에 참전해 각종 전투에 참가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 확대 이후에는 일본군 고급 장교가 돼 침략전쟁을 수행했다. 공적이 인정돼 일본 정부로부터 1935년과 1939년에 걸쳐 훈장을 받았다.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 해방 후 이응준은 초대 육군참모총장과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된 친일파 김백일 역시 마찬가지다. 1937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를 졸업하고 이듬해 3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1938년부터는 간도특설대의 창설요원으로 참여해 간도성 일대의 항일무장부대 공격에 참여했다. 해방 때까지 동 부대의 중대장으로 간도성 및 열하성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김백일은 만주국 정부로부터 1943년 9월 훈장을 받았다. 해방 뒤 1946년 오늘날 국군의 모태가 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해 제3사단장 등을 지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제1군단장으로 참전했다. 195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에는 육군 중장으로 추서됐다.
현재 김백일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안에서 가장 높고 양지바른 곳에 있다. 그의 묘에 서면 한강을 비롯해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나란히 묻혀 있는 국립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