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이 져야 했던 역사의 무게 때문에 항상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봉창 의사이다
국가보훈처
이봉창의 의거는 비록 적중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본인은 일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는 더욱 악랄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불행부중(不幸不中)' 즉 불행히 적중시키지 못하였다라는 중국의 신문보도를 트집잡아 상하이를 침공했으며, 같은 한인애국단원인 윤봉길에 의해 일왕 생일 및 상하이전승기념 축하회장에서 폭탄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나 천도교에서 세운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수료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이 되었다. 이후 용산역의 용원으로 채용되어 역부 노릇을 하다가 192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제대로 먹지 못해 각기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다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8년 11월 교토에서 거행된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구경갔다가 일경에 끌려가 유치장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할 때 그 성실성에 감동된 주인의 양자로 들어가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꾼 뒤 도쿄 등지를 다니면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어서 일본인 비누공장 점원, 해산물 도매상, 요리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다가 29세 때인 1930년 12월 일본 선박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조선인이 차별받고 착취당하는 것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하고자 신문에서 보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는 상하이로 간 것이다.
이봉창은 뒷날 재판을 받으면서 상하이로 가게 된 이유를 밝혔다.
"나는 2년 정도 일본인으로 변신하여 살아보면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의 본명인 이봉창으로 살기로 하고 차별이나 압박을 받아도 관계가 없는 조선인으로서 생활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때이기도 하여 곧 결심하고 상해로 갔다."
이봉창은 1931년 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임시정부와 함께 있는 대한교민단 사무실을 찾아갔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하여 임금을 받으면 임시정부를 돕겠다는 생각이었다.
민단의 관계자들은 아무런 소개장도 없이 일본인 행색을 하고 불쑥 나타나 일본어가 반은 섞인 한국말로 떠드는 괴청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밀정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이봉창은 다음날 다시 찾아와 자신의 포부를 거듭 밝혔다. 이를 옆방에서 듣고 있던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가 자기방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불타는 애국심과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가 일으킨 만보산사건과 만주침략 등으로 악화된 한ㆍ중 양민족간의 감정을 풀고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한인애국단의 구성은 단장 김구와 핵심단원은 안공근ㆍ김동우ㆍ김해산ㆍ엄항섭ㆍ김홍일ㆍ안경근ㆍ손창도ㆍ김의한ㆍ백정기ㆍ김현구ㆍ송두환ㆍ주염ㆍ양동호ㆍ이덕주ㆍ유진만ㆍ윤봉길ㆍ유상근ㆍ최흥식ㆍ이수봉ㆍ이성원ㆍ이성발ㆍ왕종호ㆍ이국현ㆍ노태영ㆍ김긍호ㆍ김철 등이었다. 이봉창도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이봉창은 김구와 몇 차례 만난 자리에서 자기가 교토에서 일왕 즉위식을 구경한 이야기를 하면서 폭탄만 있으면 일왕이 지나갈 때 투척하여 죽이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김구는 이봉창의 구상을 믿었다.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준비를 서둘렀다.
김구는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상하이 병공창 병기주임의 직책을 맡고 있는 김홍일에게 이봉창이 소지하고 갈 폭탄을 제조시켰다. 얼마 후 김홍일은 휴대하기 간편하고 안전하며 또 멀리 던질 수 있는 수류탄 2개를 제조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청사 임대료는 물론 중국인 통역관 월급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김구는 미국 교포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마침 하와이국민회 등에서 기금이 들어왔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중국 지폐로 300원을 주며 일본으로 갈 여비와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사도록 하였다. 몇 달치 임시정부 운영자금에 달하는 돈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 손에 폭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김구 앞에서 선서문을 낭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