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에는 머리 잘린 불상이 여러 개 전시돼 있다.
홍성식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는 머리가 잘린 불상이 여러 개 전시돼 있다. 누가, 어떤 이유로 불상의 목을 제거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 잘린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저지른 횡포라는 학설도 있고,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만행(蠻行)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건 머리가 없는 '불비(不備)의 불상'은 보는 이들에게 우울함과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9세기 말 신라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목 잘린 불상'처럼 위태로웠다.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흉흉한 소문이 서라벌을 포함한 신라 땅 일대를 끈질기게 떠돌았다.
특히 진성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농민 반란'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역사학자 신호철과 홍승기 등은 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진성여왕 집권기 농민 반란을 당시 정치적 상황과 연관 지어 여왕의 즉위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진성여왕 3년(889년)의 농민 반란은 이전의 경우와는 다른 성격을 보이기 때문이다. 진성여왕 이전에는 주로 토지가 없거나 빌려서 경작하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과 달리 이때는 자영농까지 반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가 공권력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작농이 아닌 자신의 땅을 가진 농민들까지 왕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던 이런 양상은 신라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당시는 가뭄 등의 자연재해로 인해 자영농도 끼니를 걱정할 만큼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했다고 한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주도한 농민 반란은 진성여왕의 정치적 입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하고 이룬 삼국통일 이후 200여 년 가량 '좋은 시절'을 보냈던 신라가 귀족들의 자리다툼과 실패한 조세정책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큰 위기를 맞은 것이다.
서기 889년. 농민이었던 원종과 애노는 과도한 세금에 항의하며 주위 사람들을 규합해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든다. 반란 소식을 접한 진성여왕은 영기(令奇)를 토벌대장 삼아 군대를 보냈으나, 굶주림과 절망에 분노한 농민들의 기세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전했다.
'원종과 애노의 난'이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알려주는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반란군의 대부분이 이어진 후삼국시대의 도래로 인해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서라벌의 왕과 귀족에게 반발했던 지방 호족세력에 흡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전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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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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