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하니 나는 '경력단절여성'이 됐다. 견디면 '독한 년'이고 견디지 못하면 '못난 년'이 되는 세상, 나는 '못난 년'을 선택했다. (사진은 tvN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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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을 다섯 번이나 하고서야 겨우 정규직이 됐다. '정규직'이라는 이름 앞에서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그렇게 안전한 세상이 오는가 싶더니, 아차! 임신을 했다.
너무 뻔한 이야기다. 힘들게 스펙 쌓아 회사에 입사했건만,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눈총을 받았다. '네 인생은 이제 끝이야. 애엄마를 회사가 왜 쓰냐'라는 말을 축하 인사보다 먼저 마주해야 했다. 여자가 다니기 좋은 회사와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었을까? 임신이 죄인 걸까? 여자인 게 죄인 걸까?
정서적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하니 나는 '경력단절여성'이 됐다. 견디면 '독한 년'이고 견디지 못하면 '못난 년'이 되는 세상, 나는 '못난 년'을 선택했다.
회사에 간 남편을 기다리며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으면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듯했다. 하루 종일 하는 말이 정해져 있고, 부르는 이름도 하나밖에 없는 삶. '이러려고 대학 나오고 열심히 산 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서늘하게 스치곤 했다.
상승곡선처럼 자라나는 아이에 비해, 내 인생은 하향곡선으로 계속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재취업, 재교육을 찾아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경력단절여성을 위한 자리를 찾기란, 이전 경력에 맞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다시 꿈꿀 수 있을까?
나는 자라오면서 '전업주부'를 본 적이 없다. 엄마부터 이모까지, 나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밖에 나가 돈을 벌었다. 그걸로 집을 사고 가정을 이끌었다. 남편과 비슷한 수준 혹은 그 이상의 수입이 저마다 있었다. 그들을 보며 자라난 나에게 일이란 꿈의 발전적인 형태 그 이상, 곧 삶의 근간이 되는 행위였다. 그 근간을 잃어 버리니 나의 존재가 무가치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아이가 생후 6개월이 됐을 때, 나는 창업교육을 듣기로 했다. 기존 회사 시스템에선 언제나 뒤처지는 존재니, 아예 나에게 맞는 회사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마침 '아이돌보미'가 상주하는 창업교육을 찾았다. 기저귀와 노트북을 챙기고, 아기띠를 두르고 교육을 받으러 갔다. 같은 공간에서 아이와 함께 교육을 들으니 나도, 아이도 어렵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잠투정을 하거나 떨어지기 싫어하면 안아가며, 업어가며 수업을 들었다.
창업교육의 하이라이트는 사업계획 및 구상 발표다. 오랜만에 식탁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발표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를 아기띠로 안고 재우며 자료를 찾고 문서를 작성했다. 아이가 깨면 행여 말썽을 일으킬까 봐 저장 버튼을 누르고 잽싸게 노트북을 닫았다. '다시 일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다르게, 머리는 잘만 돌아갔다. 아이를 돌보면서도 발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식탁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시간 나는 대로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