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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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7일 성명을 내어 "보훈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와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라"면서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은 국가유공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김원봉 서훈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자유한국당에서도 같은 입장을 밝히는 의원들이 나왔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북한 정권 출범 공신에게 서훈하겠다는 것은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며 "보훈은 근본적으로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을 기리는 것으로 현대사 인물을 섣불리 평가하는 일은 국민 속에서도 합의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왜 공산주의자가 됐나
일본의 조선 강점은 선진 자본주의 진영의 세계 침략에 편승해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독립투사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꼭 공산주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적에 대항할 이념적 무장을 갖추고자 그랬던 측면이 좀 더 컸다.
또 독립투쟁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주로 전개됐다. 국내에서는 제약이 많으므로 무장투쟁을 하자면 그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러시아 역시 일본과 대립했으니, 그곳 공산당과 협조하는 독립투사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보훈처가 선정한 독립유공자 중에 공산주의자가 적지 않은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또 1945년 해방 뒤에 이승만과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향했다. 북한도 결과적으로는 단독정부를 세웠고, 민족분단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김구·김규식과 김일성·김두봉의 남북협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남북분단에 대한 책임에서 이승만 정권과 북한 정권은 어느 정도 차별성을 보였다.
이 시기에 분단을 반대하는 독립투사들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미움을 샀다. 백범 김구나 몽양 여운형도 그랬다. 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분단을 받아들이고 남한에 남거나, 분단을 거부하고 남한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남한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월북을 택한 독립투사들은 고향 땅에서 잊히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고향을 관할하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서도 지워져야 했다. 1888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한 벽초 홍명희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벽초 홍명희의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