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역사문화관에 복원·전시된 황룡사 9층목탑.
이용선 제공
법흥왕(재위 514∼540)의 불교 공인 이후 신라에는 대규모 사찰이 우후죽순(雨後竹筍) 들어선다. 선덕여왕이 통치하던 시절에도 분황사, 영묘사, 법림사, 통도사 등 20여 개의 사찰이 만들어졌다.
역사학자들의 공통적인 지적처럼 신라의 불교는 국가 혹은, 왕의 권력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선덕여왕이 가졌던 권위를 짐작하게 만드는 거대한 건축물 황룡사 9층목탑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황룡사는 지금의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신라 최대의 절 중 하나였다.
진흥왕 14년(553년) 왕이 기거할 새로운 궁궐을 짓던 중 어두워진 하늘에서 황룡이 나타난다. 숭배 받는 동물의 출현을 신기하게 여긴 왕은 궁을 만들던 자리에 사찰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황룡사다. 자그마치 2만5천 평에 이르는 거대한 가람(伽藍)이었다.
선덕여왕은 바로 이곳에 높은 목탑을 축조한다. 황룡사 9층목탑이 세워질 당시 공사현장의 총감독이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었다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가진 무게감을 보여준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춘추는 후에 삼국통일의 밑그림을 그리는 태종무열왕이 된다.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하나'로 불리는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년)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승려 자장(慈藏·590~658)의 건의로 만들어졌다. 연구자들은 변방 아홉 국가의 침탈로부터 신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담기 위해 탑을 9층으로 설계했다고 말한다.
문헌과 학자에 따라 탑의 높이는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된다. 하지만 80m 안팎이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현대적 건설장비 하나 없던 1400여 년 전에 그 정도 높이의 목탑을 만들 수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탑의 꼭대기에선 당시 서라벌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을 터. 최고 통치권자였던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목탑을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황룡사로 행차한 여왕의 모습은 어땠을까?
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의 불교 수용과 확산>은 황룡사 9층목탑의 축조가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왕실의 권위 강화와 외침의 저지라는 목적 속에 건립된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 땅에 불국토'라는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라 불국토의 관념으로 확대되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황룡사 9층목탑을 볼 수 없다. 만들어진지 50년 후 벼락에 맞아 파손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됐으나, 1238년 몽골군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진 탓이다.
현재는 경주시 구황동에 자리한 황룡사 역사문화관에서 1/10로 축소·복원된 9층목탑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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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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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예술 애호가'? 선덕여왕은 재평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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