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 오르는 길목에서 내려다본 백련암. 오른쪽 두 번째 건물이 선생이 은거하던 성윤당이다.
정명조
백련암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머물며 수행하던 백련암(白蓮菴)에 갔다. 태화산 중턱 작은 암자이다. 관음전 옆 건물이 선생이 거처하던 요사채라고 했다.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인기척에 보살이 문을 연다. 선생처럼 온화한 미소를 띤다. 안에 감추어진 편액을 가리킨다. 성윤당(性允堂)이다.
당시 선생은 질풍노도의 20대였다. 겨우내 기나긴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성윤당 앞 약수로 뜨거운 가슴을 식혔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약수를 한 모금 마시니 속이 시원했다.
백련암 뜰을 지나 계단을 올라간다. 마애불이 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한다. 광복을 위해 두 손 모았을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무엇을 빌까. 한참 망설였다.
선생은 반 년 정도 머물다 1899년 봄에 마곡사를 떠난다.
'나는 진세간(塵世間) 연(緣)을 다 할단(割斷)치를 못하엿거나, 망명객(亡命客)의 임시(臨時) 은신책(隱身策)으로거나, 하여(何如)하엿든지 단(但)히 청정적멸(淸淨寂滅)의 도법(道法)의만 일생(一生)을 희생(犧牲)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한다. (중략) 백미(白米) 십두(十斗)를 방매(放賣)하야 여비(旅費)를 하여 가지고 경성을 향(向)하고 출발(出發)하엿다.' <정본 백범일지>
백범 기념 식수
광복 이듬해, 선생은 마곡사를 다시 찾는다. 20대 승려에서, 70대 한 나라의 주석이 되어 온 것이다. 마곡사 동구에 승려들이 늘어서 지성껏 환영한다.
능엄경(楞嚴經)에 나오는 대광보전 주련(柱聯)을 보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물러나 속세를 돌아보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 마치 꿈속 일만 같다
광복을 위하여 독립운동 하던 시절을 돌아보니, 마치 꿈같았으리라. 주련은 선생의 미래를 예언하듯,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선생은 염화실(拈花室)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그때 심은 향나무가 푸름을 간직한 채 지금도 백범당 옆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