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실전을 벌이는 미군의 모습.
위키백과
동아시아와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태평양 상에 큰 나라가 없으며 사실상 뻥 뚫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지역은 붙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아시아 방어선이 뚫리면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가 곧바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
필리핀 주둔 미군이 현지 국민들의 반미감정을 견뎌내면서 주둔한 사실, 1976년부터 기지 사용료를 내면서 주둔한 사실, 미군이 1992년에 쫓겨난 뒤에도 필리핀 재주둔을 위해 노력한 사실은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이 실상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데도 한국 정부가 과도한 분담금을 지불하는 원인 중 하나로 협상력 부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남창희 인하대 교수는 '한국의 적정 방위비 분담 연구'라는 논문에서 "한국은 능력에 비해 높은 대미 주둔군 지원을 적정 수준으로 재조정해야" 한다면서 협상력 부족을 거론했다.
"이러한 여러 요인 외에도 한국의 대미 주둔비용 분담 과다 요인으로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측의 협상 전략의 미비와 그에 따른 협상의 실패를 들 수 있다." - 한국전략문제연구소가 1999년 발행한 <전략논총> 제11집에 수록
한국 정부의 협상력이 부족한 이유와 관련해, 방위비 분담이 1991년부터였다는 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1990년 독일 통일을 계기로 냉전이 해체되고 탈냉전 훈풍이 부는 속에서도 한반도에서만큼은 냉전 구도가 계속 유지됐다. 이것은 '안보관(觀)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한미 양국 사이에 중대한 차이를 초래했다. 그 전까지 방위비를 분담하지 않았던 한국이 이때부터 분담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여기서 발생했다.
냉전시대에 미국이 주한미군을 배치한 일차적 목적은 소련(러시아) 견제에 있었다. 이차적 목적은 중국과 북한의 견제였다. 반면, 주한미군을 수용한 한국의 일차적 목적은 북한 견제였다. 소련 및 중국 견제는 한국한테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주적이 실상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고상두 연세대 교수의 논문 '탈냉전 이후 동맹관계의 변화'에 이런 대목이 있다.
"냉전시대 미국은 소련을 제1의 적으로 하였고, 동북아 지역 안정 그리고 한반도의 전쟁 재발 방지는 그 다음 목적이었다. 반면, 한국에게 있어서 안보의 우선순위는 미국과 역으로 전개되었다." - 한국정치학회가 2001년 발행한 <한국정치학회보> 제35집 제2호에 수록
그런데 탈냉전이 시작되고 소련이 해체되자, 주한미군이 소련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됐다. 중국과 북한을 견제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았지만, 탈냉전은 적대세력이 한반도를 경유해 미국을 침해할 가능성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1990년에 미국이 약 4만 명이던 주한미군을 2만 명까지 감축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그 같은 안보관의 전환 때문이었다. 소련이라는 큰 적이 사라졌으므로 한반도에 2만 정도만 배치하면 미국 안보에 지장이 없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2만 명까지는 감축되지 않았지만, 미국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안보관의 전환에 기인한 것이었다.
소련의 붕괴, 안보관의 전환... 한국은 달랐다
그런데 그런 전환이 한국 정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통해 일차적으로 소련을 견제하던 냉전시대에도, 한국 정부는 소련은 보지 못하고 북한만 봤다. 북한을 과도하게 의식한 탓에, 한국 정부의 눈에는 주한미군이 북한 견제용일 뿐이지 소련·중국 견제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 안보 위험이 줄었다는 판단 하에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는 북한만 바라보다 보니 안보 위험이 낮아졌다는 점을 실감하기 힘들었다.
이는 1991년부터 한국이 주한미군 분담금을 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제 미군을 감축해도 될 정도로 이곳이 예전보다 안전해졌다'고 판단한 데 반해, 한국 정부는 '북한이 상존하므로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한국 정부를 상대로 미국이 분담금을 받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미국이 완전 철군을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북한과 중국을 견제할 정도로는 병력을 남겨둘 생각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위협이 사라진 점을 감안해서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것인데도,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을 북한 견제용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탈냉전을 계기로 미군이 완전 철군하지 않을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 안보를 총괄하는 미국은 한반도에서 한숨을 돌리게 된 반면, '주한미군은 북한 견제용'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한국 정부는 그런 미국을 보고 더욱 더 긴장했으니 두 나라 사이에 협상력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