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 책 표지.
한겨레출판
여성단체 활동가, 작가, 국문과 교수, 국립국어원 연구관 등이 모여 호칭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물꼬를 틀 결과물을 내놓았다.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는 자칫하면 어려워질 수 있는 호칭 문제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 '자칫하면 어려워질 수 있다' 고 한 것은 정말로 한국사회에서 호칭문제는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호칭(呼稱)'은 말 그대로 '어떻게 부를 것이냐'의 문제지만, 현실은 그게 끝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단순히 정체성 인정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서열 인정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래서 호칭을 둘러싼 갈등은 그 양상이 치열하고 졸렬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날이 갑을관계가 추악하고 강고하게 발전하는 탓에 서열을 따지는 문화가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그리고 호칭에는 그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나 지위를 뜻하는 '지체'가 압축되어 있으므로, 호칭이야말로 서열 인정의 리트머스 시험지 노릇을 한다.
책에 나온 예시를 통해 '서열 인정의 성격'을 알아보자. 대표적으로 '여사'라는 표현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여사(女史)'를 결혼한 여자 혹은 사회적으로 이름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기업에 다니는 중년 여성 이사를 '여사'라고 부르지 않는 반면 청소, 매장 정리, 손님 응대 따위의 일을 하는 중년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대개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사전적으로는 높여 부른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범 작가의 말을 빌리면 "존칭에 묻어 있는 평온과 품격을 무참히 짓밟"는 표현이다.
호칭 문제가 복잡해진 것은 신분제가 사라지고 민주화 되면서 공적인 조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신분제가 사라진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는데도 '갑질'이 만연하다. 현실과 관념이 충돌하는 부분이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다는 것도 모두들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사회의 호칭 민주화에서 관건은 '나이'와 '지위'와 '남녀'의 차이에 따른 호칭의 서열을 어떻게 녹여버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세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인격의 차이로 확대시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전통적인 서열 기준이다. (...중략...) 다만, 남녀차별 문제는 개선 정도와 무관하게 논의가 비교적 널리 일어나는 데 비해 나이와 지위의 높낮이에 따른 차별 문제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이와 지위의 차이를 뛰어넘는 데에는 더 많은 문화적 각성이 필요하다.
정말로 그러하다.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기도 하는 요즘 시기에 성차별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공론화되고 있지만 나이와 지위에 따른 서열문화는 자연스러운 사회질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작가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위계질서가 한 개인의 삶에서는 처음 세워지는 서열의 기준이라서 쉽게 변하기 힘듦을 지적한다.
김하수 전 국문과 교수는 모든 영역과 분야에서 누구에게나 편하게 쓸 수 있는 '보편적 호칭'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광복 이후 일본식의 어휘를 거부하는 시도가 대체로 '언어의 형태' 문제에 집중되는 바람에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던 것이다. '마나님', '나리마님', '아기씨'와 같은 전근대적인 호칭이 물러간 자리에 '사장님', '사모님', '여사님'들이 파고드니, 더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더 요원해졌다.
결국 호칭 문제는 개개인에게 심적인 부담과 스트레스, 더 나아가서는 불쾌감으로 다가온다. 이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2017년 국립국어원이 시행한 '사회적 소통을 위한 언어 실태 조사' 사업(10~60대 국민 4000명 대상)에 나타난 각종 응답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인척을 부를 때 호칭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각각 43.5%, 28.7%로 나타났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혈연관계 내에서의 다양한 호칭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30%가 넘게 나오고 있다.
특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호칭에 대해서도 불쾌함을 표출하는 이들이 많다. 직장 상사와 동료가 여성 직원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경우(84.5%), 손님이 관공서 직원이나 서비스직 종사자들을 '아저씨/아주머니'로 부르는 경우(46.6%) 혹은 '여기요/저기요'로 부르는 경우(33.9%) 등. 신경 쓰지 않으면 관성적으로 사용하곤 하는 표현들이다.
명절 때만 공론화되는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