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28〉 제주 고산리식토기. 높이 25.6cm.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평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사진129〉 고산리식토기 조각.
제주국립박물관
흙 반죽에 풀대를 정말 섞었을까?
일단 이 그릇과 관련하여 학계에 잘못 알려진 것부터 정정할 필요가 있다.
고산리식토기라 하는 원시무문토기는 빚을 때 바탕흙(胎土)에 풀 같은 유기물을 첨가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나왔다.
-이건무·조현종, 《선사 유물과 유적》(솔, 2003), 69쪽
여기서 이건무·조현종은 이 토기를 '무문토기', 즉 무늬가 없는 토기로 본다. 그런데 이 그릇의 겉면 풀대 자국은 고산리 신석기인이 일부러 낸 무늬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밝히겠다.
또 흔히 고산리식토기 하면 어느 글을 읽어도 흙 반죽에 풀을 섞었다는, '보강제'로 풀을 넣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이것을 알려면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그릇을 찍어 보든지 아니면 깨뜨려 봐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봤다는 연구 성과물은 아직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릇을 확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진128〉은 해상도가 아주 높다. 크게 확대해서 보면 흙 반죽에 처음부터 풀대를 넣어 반죽했는지, 아니면 그릇을 빚은 다음 풀대를 그릇 표면에 두드려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릇을 빚은 다음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본다.
흙 반죽에 처음부터 풀대를 섞었다는 말은 상식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 풀대는 그릇을 구울 때 탈 수밖에 없다. 구덩이를 파고 아래에 나뭇가지를 놓고 굽더라도 불 온도는 600도 정도 된다. 이 온도면 그릇 표면뿐만 아니라 흙속에 있는 풀대도 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풀대 공간이 생겨 물이 샐 수 있고 그릇이 잘 깨질 수밖에 없다.
고산리 신석기 그릇 장인이 되어야
이 그릇의 무늬를 읽을 때는 자신이 직접 고산리 신석기 그릇 장인이 되어야 한다. 한 신석기인이 고산리 산 낮은 언덕에서 흙을 파 왔다고 치자. 우선 신석기 장인은 흙 속에 있는 돌이나 나무뿌리 같은 것을 골라낼 것이다. 큰 모래 알갱이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릇이 매끄럽게 빚어지고 구워도 단단하다. 그릇을 빚어 본 신석기인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자명한 상식이다. 그래서 고산리 신석기인이 흙 반죽에 일부러 풀대를 넣었다는 것은 상식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뭔가 표현하고자 했다.
또 하나, 세계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무늬를 새기거나 그렸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나라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비와 구름을 가장 많이 그렸다. 한반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석기 1만 년 동안 달, 별, 해, 사람 같은 것은 새기지 않았다.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릇 겉면에 하늘 속 물, 하늘(경계), 하늘 아래 구름, 구름에서 내리는 빗줄기, 이 비가 흘러가는 심원의 세계를 새겼다. 제주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