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24시간 내내 아기만을 위해 살 각오였다. 갓 태어난 아기는 심각하게 무능하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언제나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사진은 KBS2TV 드라마 <고백부부>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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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개월 차 엄마다. 임신 기간 동안 100일 남짓의 심각한 입덧기를 제외하고는 출산 이틀 전까지 일을 쉬지 않았다. 출산 이후의 삶도 노력하면 출산 전처럼 유지할 수 있을 거란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산후 70일경부터 글 쓰는 엄마들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백일이 넘을 무렵 재택근무와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었나' 싶다. 사회에서 배제될까 두려웠고, '엄마'란 무게는 버거웠다. 이 글은 초보 엄마의 육아 노동 적응기이자 '나'를 지키기 위한 200일간의 투쟁기이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을 임신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입덧 좀 하다 보면 배가 불러오고, 몸이 버거워진다 싶을 즈음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짠'하고 아기가 태어나는 줄 알았다.
당시 나는 육아 지식과 산후조리만 고민했을 뿐, '엄마'라는 새 정체성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모빌을 보며 방긋 웃어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엄마 껌딱지'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24시간 내내 아기만을 위해 살 각오였다.
엄마, 왜 나만 힘든 걸까
독박육아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육아는 노동집약의 끝판왕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심각하게 무능하다. 신생아는 20시간 넘게 잔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20시간을 충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양육자에게 찰싹 붙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언제나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아이는 잠이 든 이후에도 내게 붙어 있었다. 잠시라도 소파나 침대에 걸터앉으면 바로 깨서 울어댔다. 덕분에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아이를 안고 집안을 배회했다. 종일 집에 있어도 쉴 수 없었다.
둘째, 사회적 교류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초기 육아 시기에 엄마는 기본값이다. 산후조리란 명목으로 '엄마에게만' 주어지는 휴식기는 독박으로 이어진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슈퍼조차 갈 수 없었다. 집보다 집 밖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던 내게는 큰 고문이었다.
외출보다 더 절실한 것은 '어른과의 대화'였다. 남편이 늦는 날이면, 온종일 "우와~", "끼야악"과 같은 감탄사나 "안녕", "엄~마"와 같은 단순 단어만 쏟아내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와의 대화는 고독했다.
어제까지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한순간에 일상의 자유를 빼앗겼다. 그럼에도 변화된 환경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어려움은 '엄마니까'라는 말로 퉁친다. '엄마는 아이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엄마의 시간이 없는 건 당연하다', '다들 그렇게 해왔다', '엄마니까'. 그렇게 나는 내가 속해 있던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우리가 보고 자란 엄마처럼 나 또한 무난히 엄마가 되리라 믿었다. 그 과정에서 방황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수면 부족이나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약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나 자신이 같은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나는 다르겠지'라며 허세를 부렸다. 나 또한 아이와 단둘이 고립되면서 눈물과 자책의 시간에 부딪혔다. '내 아이를 혼자 못 돌보겠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지금껏 배워온 모성신화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엄마 과도기의 고통'은 공론화되기도 전에 '나약한 우는 소리'나 '호르몬 영향에 의한 산후 우울증'으로 치부된다. 우리 엄마들은 다 그렇게 아이를 키워왔다며 비교한다. 누구나 다 하는 일, 심지어 신성하기까지 한 이 일을 힘들거나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학습된 금기이자 숨겨야 하는 열등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