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위) '#개사랑' 검색 결과 (아래) '#돼지사랑' 검색 결과.
고함20
지난해 초에는 '황금개'를 앞세운 상품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반려견을 위한 장난감, 사료, 옷 등에 대해 다양한 이벤트도 진행됐다. '개'의 해라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마찬가지로 황금돼지 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돼지를 위한 것은 없다. 아무도 텀블러에 돼지 캐릭터만 새기지 말고, 살아 있는 돼지의 삶에 주목해보자고 말하지 않는다. 개와 고양이에게 장난감이 필요하듯, 돼지에게도 장난감이 필요하지 않을까를 질문하지 않는다. 똑같은 황금, 똑같은 시기. 바뀐 것은 '개'냐 '돼지'냐 뿐이다.
살아 있는 돼지는 안 되지
돼지 캐릭터 상품을 보며 살아 있는 돼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불판에 구워지는 삼겹살 덩어리가 먼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살면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돼지를 볼 기회는 거의 없다. 돼지와 교감할 기회는 더욱 없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마주할 수 있었던 '살아 있는' 돼지라곤 (고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기돼지 삼형제>나 <샬롯의 거미줄> 따위의 이야기책, 조금 더 생생하게라고 해봤자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뿐이다. 실제 삶에서 볼 수 있는 돼지의 흔적은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가 전부다.
그러니 코끼리 다리를 만지며 "코끼리는 두껍고 길고 둥근 기둥"이라 말하는 것처럼 "돼지=맛있는 고기"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진실'을 마주할 기회는 분명 있다. 돼지가 돼지고기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대부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다. 모르더라도, 죽는 일이 돼지에게 유쾌한 일이 아님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미 '돼지=맛있는 고기' 공식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 '진짜로' 살아 있는 돼지가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존재를 거부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명을 취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고기를 먹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는 생각이 충돌한 결과다.
이 불편함은 '동물' 돼지의 존재를 더욱 은폐한다. 결국 남는 것은 고기와, 웃고 있는 돼지 캐릭터뿐이다. 가상과 사체는 소비는 괜찮지만 그 뒤편의 생명은 괜찮지 않은, 씁쓸한 현실이다.
황금돼지의 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