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고요한 집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비가 내렸다. 비만 내리지 않고 벼락이 쳤다. 우레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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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난다. 어떤 날에는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시간이 몇 시인지 몰랐고 침대 너머로 창밖을 보니 아직 하늘이 새카만 것이 싫었다. 한 번 잠에서 깨니 잠에 다시 쉽게 들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이렇게 적막한 집구석이,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가 각자의 방에서 잠들어 있을 이 집구석이 더없이 적막하고 고요했다. 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이불 속으로 온몸을 숨겼다. 발목 하나 손목 하나 이불 밖으로 나올까 싶어 이불 양 귀퉁이를 손으로 꼭 잡았다. 밤일까, 아침일까. 귀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는데 어느덧 고요한 집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비가 내렸다. 비만 내리지 않고 벼락이 쳤다. 우렛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에 숨어 그 소리를 듣는 건 더 무서웠다.
다음 번개가 치고 우레가 칠 때면 누군가 이불을 젖히고 나를 덜컥 잡아 흔들 것만 같았다. 사탄이라는 말을 기억한다고 했다. 이불 속에 떨며 계속 우렛소리를 들어야 했던, 비 오던 어느 밤 역시 똑똑히 기억한다. 어서 아침이 오길 바랐고 누군가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인기척이 들렸으면 했다. 그 밤을 기억한다.
시간이 이십 년 가까이 흘렀다. 딸 아이는 아직 혼자 잠들지 못해서 밤에 함께 누워있어야 했는데, 아이는 어둑한 방을 무서워했다. 물어보니 방이 깜깜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누군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그것이 무섭다고 했다. 그리 밝지 않은 수면 등을 켜고 곁에 누워있어 주었다. 아이는 장난을 치고 뒤척이다가 곧 아이다운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아이는 밤이 무섭다고 했지만, 잠자리에 들고 나자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무섭다는 감정. 으스스하다는 기분. 온몸에 한기가 돌며 서늘하다는 감각을 느낀 것이 과연 언제가 마지막이었나 싶었다. 나이가 들며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더 많아져서 그런 걸까.
아니다, 어느 정도 아는 것들이 채워진 이후에는 더 이상 모르는 것을 찾고 경험하기보다는, 아는 것들 속에서 안락하게 쳇바퀴를 돌며 살아갔다. 몇 개 없지만 그나마 아는 것들 속으로 숨었고, 그곳에서 무서울 것이란 크게 없었다. 내가 영위하고 마주하는 것들은 대개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낯선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나의 감각은 쉽게 무뎌졌다.
그러니 비록 나는 무서움에 질식하였으나 잠이 깨 밤새 이불 속에서 숨어야 했던 밤, 밤새 들리던 우렛소리 속에서 나의 연약한 윤곽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 순간 내가 거기에 있었음을 안다. 무서움에 대해 더 이상 떠올리지 않으면서 내 존재의 윤곽을 더듬고 새롭게 느끼지 않았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삶이라는 걸까. 아, 그러고 보니 우렛소리를 들은 것이 정말 오래 되었지 …
나는 차가운 마루에 앉아 있고
우레는 나를 지나간다
우레의 지나감은
어떤 윤곽을 생각게 되느니
눕다 다시 바로 앉아 돌이키느니
그마저 내가 숨어서 한 일을
- 문태준 시인의 <우레> 전문
그늘의 발달
문태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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