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시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인 '숙이네' 모습으로 푸짐한 음식과 인심으로 오랜만에 잃었던 한국음식에 대한 입맛을 찾았다
오문수
"33년 전 칠레에 이민 온 누나가게를 돕고 있어요. 멸치, 김, 고추장과 소주는 한국에서 배로 수입합니다. 칠레 식당에서는 반찬을 추가하면 추가로 돈을 받지만 우리는 반찬이 떨어지면 무료로 제공해줍니다. 칠레 사람들은 30~40분 정도 앉아 기다리면서도 별로 말이 없어요. 이 사람들은 깐깐하게 따지지를 않아요. 이런 사람들 처음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실컷 먹은 일행들은 "꿀맛이다!" "한국에서 먹은 것보다 맛이 더 좋다. 특히 파저리가 일품이다"라며 흡족해 했다. 맥주를 마신 후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퇴근시간이어서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 가까운 곳에 도달한 순간, 주변이 시끄러워지더니 더 이상 길을 건널 수 없었다. 대로변에는 데모대 1천여명이 행진하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칠레 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 '아나 곤잘레스' 여사의 후예들을 만나다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남미국가들 가운데서도 비교적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고 민주주의가 정착한 칠레는 우리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나라다. 그 중심에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와 피노체트 장군이 있다.
지긋지긋한 남미병을 치유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 아옌데는 1970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가 권좌에 앉자마자 진작부터 구상해왔던 급진적 변화를 추구했다. 최대 부존자원인 구리와 석탄, 철강회사와 일반은행 60%를 국유화했다. 지방에서도 농장국유화 정책을 강행했다.
2년도 채 안 되어 반대파의 조직적 반발은 물론 자영농민과 중소기업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변호사와 학자, 건축가들을 비롯한 중산층까지 가세해 시위에 나서면서 칠레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압박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을 시도하던 중 공군장성들로부터 망명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하며 최후까지 총을 들고 싸우다 자결했다. 반란군은 대통령궁을 공습해 불바다로 만들기까지 했었다.
아옌데는 칠레에 만연된 남미병인 정치부패와 경제파탄,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급진정책을 시행했지만 3년만에 좌절됐다. 아옌데의 실험이 좌절된 중요한 원인은 보수 엘리트와 군부의 지지를 얻지 못한 데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미국 닉슨 정부의 배후 조종과 간섭이다. 2000년 12월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개입했다는 보고서를 공개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군사독재의 폐해는 컸다. 17년간의 피노체트 군사독재 통치기간 동안 강제 연행돼 고문당하거나 살해 실종된 이는 4만 18명(2011년 집계)에 달했다. 확인된 희생자는 90년대 민주화 이후 유골 발굴과 DNA대조를 통해 확인된 숫자이지만 아직도 1천여 명이 실종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