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빙하우스의 기억력 곡선단어 100개를 외웠다는 가정하에 그려보았다. 실제 저렇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자책하는 아이들이 많다.
장정환
우리는 자녀들에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진리를 공부할 때만 예외를 둔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답답한 마음에 '너는 왜 맨날 까먹냐'고 핀잔도 준다. 하지만 예외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필자도 간혹 조카나 아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다이어트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손으로 쓰면서 외우고 학원에 가서 단어 쪽지 시험을 보러 가는 장면이다. 다행히 조카는 학원에서 제시하는 항상 커트라인은 잘 넘겨온다.
문제는 다음 날이다. 특히 단어 학습은 휘발성이 강해 어제 잘 외웠다고 오늘 다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내일이면 더 심해진다. 당연한 현상이다. 영어는 엄연히 외국어다. 우리말에 비해 현저하게 사용 빈도가 떨어지는데 그것을 집어넣으려면 반복뿐이다. 당장 잊어버렸다고 아이들을 혼내야 할 것이 아닌 것이다.
한 번은 가족들이 모인 자리였는데 누나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조카가 단어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 다음 날이면 거의 다 잊어버려서 자책하는 것 보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부모 마음이야 똑같고 대학 입시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어가 중요하다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조카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라고 누나부터 안심시켰다. 그리고 조카를 불러 앉혔다.
"삼촌이 물어보는데 널 혼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괜찮아. 엄마 허락받았어. 혹시 학원에서 단어 시험 보고 나면 다음 날 어떻게 해?"
"그냥 다음 시험 볼 것 외워요. 시험 못 보면 남아서 외워야 해요."
아이 입장에서는 집에 빨리 가 쉬고 싶기 때문에 예상했던 답이었다. 결국 계속 '까먹고, 까먹고'를 반복하는 악순환이었던 것. 답답한 현실 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아이를 뒤로하고 누나에게 차분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쩔 수 없긴 한데... 남으면 애가 속상하고 학원의 단어 시험은 잘 봐야 하니까 조카가 했던 방법 그대로 유지를 해 줘. 다만 아이한테 부담은 주지 말고 하루에 한 번 단어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보게 해. 하루에 다 못 봐도 상관없어. 계속 반복해서 다 보게 해. 일단 한 번 다 보면 그 다음부터는 속도가 붙어서 금방 봐. 학원 진도 상관 말고 그냥 시켜. 분명 조금씩 변화가 생길 거야."
"그래서 외워져? 써야 하는 것 아니야?"
의심이 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조급하니까.
"수능 보는데 수능에서 영어 단어 쓰라는 문제는 없어. 결국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잖아? 그럼 차라리 단어하고 뜻이 눈에 누가 더 많이 익었느냐 싸움이야. 계속 반복시켜. 그리고 단어장 이것저것 사지 말고 차라리 학원에서 쓰는 교재만 반복시켜. 이 교재가 좋다. 저 교재가 좋다 이야기에 팔리지 말고 속는 셈 치고 하나만 계속 반복해서 시켜 봐. 애 분명히 변해."
지금의 교육이 학부모들의 조급증을 부추기는 것은 맞지만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정상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예의는 아니지만 고집을 부렸다. 속는 셈 치고 진행했고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외우는 것이 덜 힘들다는 이야기를 건네 들었다. 나중에는 습관이 붙어서 쉬는 시간에도 짬짬히 보기 시작해 벌써 책을 어러번 반복 해 기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실 웃으면서 컨설팅 비용 안 주냐는 핀잔에 누나가 그때 짜증 내서 미안했다는 사과는 했지만.
해마다 느끼지만 새 해 1월 2일이면 가장 북적거리는 2곳이 있다. 한 곳은 다이어트를 위해 헬스장으로 대표되는 트레이닝 센터. 한 곳은 서점이다. 서점은 외국어를 공부하겠다 마음먹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책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내려놓는다. 시간이 없어서 못 하겠다는 이유도 많지만 그것만큼 대다수의 이유는 '외워도 외워도 잊어버려서 힘 빠진다'였다. 안타깝지만 비싼 책값만 허공으로 날린다.
필자는 '이 책으로 공부하면 빨리 실력이 붙는다'라고 마케팅하는 회사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뭔가 차별화가 없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실 어떤 책이든 내용은 비슷하다. 서점에서 펴 보았을 때 좀 더 내 눈에 편하게 들어오는 책, 좀 더 내 마음에 드는 책 차이이다.
하지만 어떤 공부든 '요행은 없다'. 여러 번 봐야 하고 눈에 익어야 내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시험이든 합격한 사람들의 수기집을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바로 '반복'이다. 특히 단어(또는 어휘) 암기 학습이 '반복의 최종 보스'인 이유가 지루하고 재미없고 쉽게 잊어버려 금방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당연하다. 그러니 '단어를 자꾸 잊어버려 큰일이에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습관을 붙여 단어를 오래 기억하게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어차피 '잊어버리니까'.
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어차피 내려올 것 뭐하러 올라가요'라는 답변이다. 단어 암기를 하기 싫어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답변도 '어차피 잊어버릴 것 뭐하러 해요'라는 냉소 섞인 답변이다. 지금부터 '어차피 잊어버리니 반복하자'라고 생각해 보자. 단어 몇 자 바뀐 문장이지만 마음가짐 자체가 변할 수 있다.
말이 무서운 이유는 말을 뱉는 순간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말을 온 힘을 들여 말살하려는 이유도 말이 가지고 있는 '정신'을 이용해 완전히 우리를 세뇌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말모이>에서 그 때문에 숱한 고문을 버틴 이유도 일제가 언어를 이용해 정신마저 지배당하면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강사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을 덧붙이자면 '다른 책 기웃거리지 말고 하나만 정해서 외울 것', '본인이 가지고 있는 단어장이 가장 좋은 책이라고 믿을 것'이었다. 혹시나 공부를 하려는데 자꾸 잊어먹는다고 고민하는 학생이 있다면 꼭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충분히 본인은 '정상'이니 포기하지 말고 여러 번 반복하면 어느 순간 열려 있다고. 다만 '포기하고 본인 머리를 탓하는 순간 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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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고 또 까먹던 유해진, 나, 조카... 우리가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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