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회관(화동 129-1)의 현재 모습
박용규
동시에 정세권이 기증한 조선어학회 회관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조선어학회 애국지사들이 영웅적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지킨 항일투쟁의 장소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한글학회는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정세권도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기증한 점,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이사로 활동한 점, 양사원 건립에 참여한 점, 그리고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에 후원을 한 점 때문에 홍원경찰서에 끌려가 일제 경찰에게 곤욕을 당했다.
정세권은 1942년 11월에 홍원경찰서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일제 형사들은 "왜 하필이면 화동에 조선어학회 가옥을 지었소?"라고 정세권에게 계속 심문했다. 이후에도 정세권은 지속적으로 경찰에 불려 다녔다. 일제말기 정세권이 일본 집을 짓지 않자, 일제는 "왜 한옥만 짓느냐? 일본 집을 지어라"라고 강요했다. 정세권이 따르지 않았다. 끝까지 한옥만 지었다.
<말모이>와 함께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일제는 정세권을 탄압하고자 그를 경제사범으로 몰아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1943년(56세) 6월 18일부터 7월 6일까지 19일 동안 아들 정균식과 함께 구속했다. 구속 기간에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 사건, 특히 정세권의 양사원 관련 경위를 문제 삼아 이를 묵인하는 조건으로 서울 성동구 자양동(뚝섬) 일대의 토지 3만 5279평을 친일단체인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쿠)에 바치라고 강요했다.
즉, 조선총독부 산하 보호관찰소가 강제로 조작하여, 정세권의 무의탁 소년 실습 수련장과 그 부대농지 3만 5천여 평을 6월 23일부로 강제로 빼앗았다. 그리고 경성 대화숙으로 소유권을 강제로 이전했다. 정세권은 막대한 재산을 일제에게 강탈당했다. 그 후 일제는 정세권의 건축면허증까지 박탈했다. 이처럼 독립운동 참여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 정세권의 사업은 기울었고 재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권은 이극로가 함흥형무소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을 뒷바라지했다. 아울러 1943년에 집에 찾아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의 수하에게 군자금(독립 자금)으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제공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세권의 독립운동 참여, 특히 조선어학회에 회관을 기증하여 우리말을 지킨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세권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제5-112)에 있다.
영화 <말모이>에는 조선어학회의 직원들이 대단히 넓은 평수의 집에서 말모이 편찬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회관이 생긴 이후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은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 전까지는 안정적으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추진했다.
조선어학회가 셋방살이를 계속 전전했다면, 과연 1942년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조선어학자들에게 물적 토대인 회관을 지어 기증해준 정세권 선생의 공로에 대해서도, 영화 <말모이>를 보면서 기억하여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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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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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만 12억... <말모이> 비밀 아지트 '건축왕'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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