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교숭실대 옛 정문 입구의 표석은 1897년에 시작된 숭실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학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도동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했던 상도동계의 수장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상도동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저와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이 있다.
하지만 올해가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도동에 있는 숭실대를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기록되고 있는 숭실대는 비록 평양 시절이지만,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교이다.
숭실대가 1957년 상도동에 새롭게 자리 잡은 후에는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4·19혁명 이래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그 이름을 드날렸다.
숭실대가 동작 민주올레 '상도길'의 첫 번째 코스로 배치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
숭실대의 역사는 1897년 평양의 숭실학당에서 시작된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배위량(W. M. Baird) 박사가 1897년 10월 10일 평양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자신의 사랑방에 중학과정을 개설하면서부터이다. 대학부가 설치된 것은 1906년부터인데, 숭실전문 시절인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면서 폐교될 때까지 숭실의 역사는 평양에서 계속되었다.
이 기간 숭실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다.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에서부터 나중에 임시정부에서 일한 차리석(1881-1945)을 비롯하여 김두화, 길진형, 변인서 등 다수의 졸업생과 재학생, 교수 등이 관련되어 수난을 당하는데, 신민회는 안창호, 신채호, 양기탁, 이동휘 등이 1907년 군주정을 거부하고 공화정을 꿈꾸면서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숭실에는 3·1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조선독립청년단과 조선국민회 같은 비밀결사조직이 있었다. 조선독립청년단은 숭실학교 출신 장일환(1886-1918)이 1914년 평양에서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청년단지>를 발행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미주국민회를 이끌던 무장투쟁론자 박용만과 항일투쟁의 방안을 협의하고 돌아온 장일환은 1917년 서광조·강석봉 등과 함께 이보식의 집에서 배민수, 백세빈, 김형직을 비롯한 30여 명으로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국민보>를 발행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햐였다. 조선국민회의 멤버 중에는 서기 겸 통신원을 맡았던 배민수를 비롯하여 이보식, 이수현, 노덕순 등 숭실 출신이 많았다.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장일환/ 배민수 편 참조)
장일환은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 후 가혹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조선국민회 멤버 중 숭실중학을 중퇴한 김형직은 북한 김일성의 아버지이다.
3·1혁명 당시 숭실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숭실은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김창준을 배출하였고, 숭실 출신 저명한 독립운동가 조만식은 평양지역의 주요 인물이었다.
3·1혁명으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른 조만식은 1920년대 조산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건립운동에 앞장섰고,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남지회장도 지낸 인물이다.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숭실대 안에는 이런 독립운동가 조만식을 기리는 조만식기념관이 있다.
1919년 3월 4일 숭실대학, 숭실중학, 숭의여학교, 광성고등, 관립평양고보 등 학생들이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만세운동 때는 숭실의 전교생이 학교 안팎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3월 1일의 만세운동 직후 평양에서 등사판 인쇄물로 발행된 <독립신문>은 조선국민회 출신으로 당시 숭실대생이던 이보식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독립신문>이 인쇄된 장소는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던 마포삼열(샤무엘 모펫)의 비서를 겸하고 있던 숭실중 출신 이겸호의 집이었다. 마포삼열과 선교사 마우리는 3·1운동에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3·1혁명 당시 서울에서 학생대표의 한 사람으로 3월 1일과 5일 두 차례의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활약을 펼친 김원벽(당시 연희전문 3년)도 숭실대학 졸업생이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있는 정동교회의 목사 출신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도 숭실 출신이다.
일제 경찰이 숭실을 가리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이라고 했다는 말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