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재래시장 노점의 쌀국수. 이 소박한 한 끼가 가난했던 우리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류태규 제공
방비엔 재래시장 쌀국수집에서 만난 남매
라오스를 처음 찾았던 몇 해 전이다.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온 유럽 청년들이 마을 전체를 점령하다시피 한 방비엔에서 나흘을 머물렀다. 조그만 보트를 타고 강 위를 떠다니거나 투명한 물빛의 연못에서 종일 수영하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낡은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재래시장을 찾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민물 생선과 밀림에서 잡은 도마뱀 따위를 구경하는 재미가 만만찮았다.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찾았던 오일장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친 다리도 쉴 겸 쌀국수를 파는 좌판에 앉았다. 한 그릇에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양이 적었지만 국물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그때 옆에 앉은 누나와 남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라고 해봐야 열네댓이나 됐을까? 그런데 겨우 쌀국수 하나를 시켜놓고 대여섯 살로 보이는 동생의 입에만 그걸 넣어주고 있다. 자기는 전혀 먹지 않고.
그랬다. 40~50년 전이라면 한국에서도 흔했을 풍경. 시인 이시영(69)의 절창(絕唱) '정님이'가 눈앞으로 영화 자막처럼 흘러갔다.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 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