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선생 가족사진(부인 김공순 여사와 자녀들)1939년 12월 24일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촬영
박용규
1933년 6월부터 사전 편찬 사업은 재정문제 때문에 난항에 부딪혔다. 그래서 사전편찬 작업은 일단 접고, 사전 편찬의 기초공작인 조선어 철자법 통일과 조선어 표준어 확정에만 주력했다.
1936년 3월에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해온 사전 편찬 업무를 인계했다. 이극로 선생은 같은 해 사전편찬 후원회도 조직하여 재정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1938년 서울 안국동 공안과에서 그는 "한글 사랑은 나라 사랑"이라면서 "서슬이 시퍼런 일본 제국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정신과 생명이 있을진대 그 민족은 영원불멸할 것이니, 또한 행복은 필연적일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언어는 민족의 기본이며 중심핵이었다. 언어를 유지시키면 민족은 유지되고 끝내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은 표준말 제정을 돕기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동포들에게 "말은 곧 정신입니다"라는 연설을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엄유나 감독이 이 영화의 극본까지 쓴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고 주장한 이극로 선생의 자료를 최초로 발굴했고,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2005),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2012), <조선어학회 33인>(2014),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공저, 2010) 등의 저서를 통해 이 말을 알려왔다. 그 와중에 엄유나 감독은 영화 <말모이>를 통해 이극로 선생의 핵심 정신을 꼭 짚어줬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한다.
모진 고문까지 당하다
1942년 봄, 조선어학회는 조선어대사전의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조판 단계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사전 편찬을 중단시켰다. 일제는 사전 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조선어학회의 대표인 이극로 선생은 가정 경제를 아내에게만 맡기고 오직 민족어 규범을 수립하고,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합법적 공간을 이용해 한글운동이라는 문화투쟁을 전개했다. 한글운동은 우리 민족의 말과 민족문자인 한글을 연구·정리·보존해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렇기에 이 운동은 항일 투쟁이요, 민족 해방 운동이요, 언어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의 대표였던 이극로 선생은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겸하던 자택에서 일제 경찰에 검거됐다. 그를 포함하여 조선어학회 관련자 33명이 체포됐다.
이극로는 함흥경찰서, 홍원경찰서,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뒤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제1일에는 2차례, 제2일에 3차례, 제3일에는 2차례, 도합 7차례나 기절했다. 악형으로 말미암아 손톱과 발톱도 빠졌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의 재판부(니시다 판사)는 예심종결에 의거, 개정 치안유지법 위반을 적용해 이극로 선생에 징역 6년형을 언도했다. 이극로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에 따라 8월 17일에 석방됐다.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이극로 선생은 남한에서 동지들과 조선어학회를 재건한 뒤, 학회의 대표(간사장·상무이사)로써 학회를 운영해 나갔다. <조선말 큰사전>(1947) 1권이 나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4월 건민회 대표와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평양에 가 남북협상에 참여했고, 이후 북에 잔류했다.
조선 민중을 조명한 영화 <말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