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옥은표래은 여동생 표옥은
박만순
군·경이 수산지서에 복귀하면서 인공시절 부역활동을 했던 이들을 불러들였다. "지서에 가 봐야지" "가면 안 돼. 피신해야 돼"라며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전 수산면 청년방위대장이었던 이상근이 자신의 사촌동생만 빼돌렸다. 이상근은 이상○에게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나. 얼른 몸을 피하자"라고 하며 부리나케 마을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이들 일행과 표래은이 조우했다. 래은은 이들을 향해 "같이 일해 놓고 너만 달아나려고 하냐"며 강력히 항의하고 몸싸움을 했다. 하지만 이상근은 사촌동생 이상○을 트럭에 태우고 도망갔다.
결국 피난을 못간 표래은과 동료들은 제천 수산지서에 구금되었다. 군인들은 살기등등했다. 2개월 전인 1950년 7월 27일 지방좌익들이 면내 우익인사 8명을 '반동'이라는 이유로 수산면 수산리 황기골에서 학살했기 때문이다. 우익인사들이 학살됐기 때문에 인공시절 부역했던 이들이 검거되면 즉결처형 되는 것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산면 인민위원장 우광문은 8사단 군인들에게 검거되어 1950년 9월 말 수산리 야산 마구방골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우광문은 수산면 적곡리 출신으로 적곡리 동막에 있었던 동촉광업소(일명 동막광산)에서 남로당 조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피신을 못한 표래은 일행의 신세는 바람 앞의 등잔불 격이었다. 사실 표래은 일행과 '우익인사 학살사건'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보복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우익인사 학살사건의 주모자는 군·경 수복 전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래은을 포함한 9명은 1950년 9월 30일 8사단 군인들에 의해 충북 제천군 수산면 내리 야산에서 학살되었다. 이때 죽은 피해자 9명 인적사항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표래은, 이상열의 백부, 김대현의 부, 유동식, 유광열, 유광열의 자, 이덕주의 부가 확인되었다. 두 명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은(83세.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이 총을 들이대며 심부름시키는데 안 할 사람이 있어?"라고 반문한다. "유동식은 북한군 명령에 의해 말메기를 걷으러 다녀 문제가 되었지"라 한다. 말메기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말 먹이"라고 답했다.
결국 적을 도왔다는 무시무시한 부역죄의 실체는 북한군과 분주소장(지서장)의 명령에 의해 식량과 인원을 동원한 행위가 고작이었던듯 하다.
1차 부역자 학살이 1950년 9월 30일 수산면 내리 야산에서 자행되었고, 2차 부역자 학살은 1951년 1월 7일 수산면 수산리 황기골에서 자행되었다. 우익인사와 부역혐의자 약 50명이 이념 과잉시대에 보복학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빨치산 활동이 이뤄진 '수산리'는 다른 곳인데...
국군 8사단과 미군이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했다가 수복하면서 빨치산과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연합군이 이들만 소탕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는데 산악지역 인근마을을 전부 불태워버린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이다. 특히 충북 제천군 수산면 수산리는 빨치산 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미군이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해 착각을 일으켰다. 수산면 수산리와 월악산 인근 마을인 충북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와 혼동을 한 것이다. 당시 월악산은 빨치산의 주요 활동 공간이었고, 북한군의 후퇴 이동루트이기도 했다. 미군이 덕산면 수산리를 초토화시킨다는 것이 수산면 수산리를 싹쓸이 한 것이다.
수산면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령으로 1950년 12월 9일 피난 짐을 싸 경북 문경으로 향했다. 피난 간 지 한 달 만인 1951년 1월 초에 마을로 돌아왔을 때 주민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상은은 "수산리 200호가 전부 불타버렸어요. 당시에 타지 않은 건물은 4채밖에 없었어요" 면사무소와 지서, 이상근, 이경림 가옥이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관공서를 제외한 민가는 2채가 방화의 피해에서 벗어난 것인데, 이곳은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초가집이었기에 쉽게 타버린 것이다.
졸지에 삶의 터를 빼앗긴 주민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와 움막집을 지었다. 겨우 비바람만 피한 상태로 약 2년간을 지낸 것이다. 일부 주민들은 면 소재지 근처 마을에 가서 방을 하나 빌려 기거했다.
미군에게 성폭행 당하고, 시가에서 쫓겨나
수산면 주민들의 전쟁 피해는 가옥이 불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겨울 난리에 피난 가기 전 미군들은 수산면소재지 집들을 일일이 다니며 '처녀사냥'을 했다. 젊은 여성들이 보이면 막무가내로 납치해 끌고 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표옥은은 "약혼했던 내 여자 친구를 미군들이 납치해 끌고 갔어요. 동네사람들이 쫓아가 미군들에게 항의해 다행히 풀려났어요. 하지만 수산면 밤골에 살았던 다른 여자는 미군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했어요. 출산을 했는데 흑인이 나와 시집에서 쫓겨 났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흑인을 낳아 시집에서 쫓겨난 여성의 남편은 부역죄로 국군들에게 학살된 상태였다. 남편은 부역죄로 학살되고 아내는 미군에게 성폭행 당했다. 역사의 피해자인 이 여성은 가족과 마을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시집에서 쫓겨나는 이중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산소에 국수 가져 가서... "오빠 잡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