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오르는 미문화원불타오르는 미문화원
경향신문
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은 유신정권보다 더욱 심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날로 강화되고 고문ㆍ의문사 등 희생자가 늘었다. 이에 대한 저항도 그만큼 격렬해졌다. 투신ㆍ분신ㆍ자결 등 극한방법이 동원되었다.
부산미문화원 사건의 피신자들을 도왔던 장일순은 고민이 깊어갔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기에는 힘의 우열이 너무 심한 상태에서 승패는 뻔한 것이었다. 독재세력에는 공권력이라는 무장된 폭력이 주어졌다.
원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이창복 씨의 증언에서 이 시기 장일순의 심리적 갈등의 일면을 보게 된다.
1979년 10ㆍ26 사태로 80년대에는 '민주화의 봄이 오나 했더니, 12ㆍ12쿠데타로 등장한 소위 신군부 세력이 더욱 강화된, 본격적인 군사독재를 이어가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민주 진영은 (저항이) 더욱 치열해지게 됩니다. 80년에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도 발생하고 서울에서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나는데, 70년대 후반도 격렬했지만, 그 못지않게 80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저항에 대한 정부의 진압 방식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다 보니 거기에 대항하는 도전 방법도 상당히 폭력화되는 양상을 띠게 되지요.
무위당 선생께서는 인간 그 자체의 나약함과 인간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 민주화투쟁을 하는데 그 방법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해치고 생명을 해치는 반생명적인 모습을 띠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고민하시게 되지요. (주석 4)
장일순은 생명사상의 논지에서 극렬투쟁보다 비폭력 무저항운동론을 제시하였다. 더러는 오해도 하고 배척도 되었다. 투항주의자라는 심한 말도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장일순은 민주전선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1983년 여름 민주세력을 다시 결집하고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족통일국민연합을 결성하는데 장일순은 모닥불 역할을 하였다. 과격한 투쟁 대신에 공개ㆍ투명ㆍ대중성을 바탕으로 하자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국민연합'이 국민의 성원 속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자 장일순은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헌신한다.
주석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민주화운동사연표』,「3ㆍ18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403쪽, 2006.
2> 강원일보사,「민주화의 성지ㆍ원주를 다시 본다」,『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22호, 2007, 겨울.
3> 앞과 같음.
4>「이창복선생 인터뷰」,『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19호, 2007.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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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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