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쿠데타의 핵심 관계자들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무력 진압하면서 차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이 가운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최규하체제는 과도정권의 성격상 순탈할 리가 없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1주일도 안돼 12ㆍ12사건이 발생했고, 권력의 기반이 없는 그에게 공화당이나 유정회는 이미 정치적 기능이 상실된 여당일 뿐이었으며, 신민당은 마치 새 집권당이나 되는 듯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재야세력과 일부 정치인들은 79년 11월 24일 명동 YWCA에서 '통일주체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열어 최규하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했으며, 신민당도 과도정부의 정치일정에 심히 반발하고 나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도정부는 정부주도의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세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자체적인 정치기반이 없이 신군부의 등에 업힌 꼴인 최규하 정권으로서는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제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다. 학생ㆍ노동자ㆍ재야인사들은 정치일정의 단축과 유신잔재 청산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로 대표되는 정치집단에서는 각기 이해가 엇갈린 상태에서 마찰을 빚어 정국은 날로 혼란이 확산되어 갔다.
여기에다 신현확 총리의 2원집정부제 발언과 출처불명의 여권 신당설이 나돌고, 5월 15일의 서울역 앞의 대규모 시위와 사북사태까지 겹쳐 위기설은 더욱 증폭되어갔다.
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서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2ㆍ29복권조치에 의해 긴급조치로 해직 또는 제적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옴에 따라 학원가에서는 '학원민주화'를 외치는 토론회ㆍ농성ㆍ교내시위가 일기 시작, 3월 27일의 조선대학교의 교내시위를 시발로 서울과 지방의 각 대학으로 번져나갔고, 구호도 △ 학원 내 언론자유 △ 어용교수 퇴진 △ 재단운영 개선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는 등 유신잔당과 신군부세력의 체제개편 음모가 노골화하자 학생들은 학원민주화투쟁에서 사회민주화투쟁으로 전환, 5월 2일 1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서울대 '민주화대총회'를 시발로 각 대학이 '민주화대행진'에 돌입, △ 유신세력 퇴진 △ 계엄철폐 △ 2원집정부제 반대 △ 정부주도 개헌반대 등의 정치적인 문제를 내걸고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5월 15일 전국 대학생의 계엄해제 요구시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5월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6개 대학 2,500여 명의 학생들이 '계엄철폐'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감행하고 서울시내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13일 밤 회의를 소집, 14일부터 일제히 가두시위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4일 서울시내 21개 대학 5만여 명의 학생들은 빗속에서 밤늦게까지 서울의 종로, 광화문, 시청 앞 등 도심지에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지방 10개 도시의 11개 대학도 일제히 가두시위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