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선생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위당 사람들
1979년은 한국현대사의 변곡점이었다.
긴급조치로 포장된 폭압통치는 제1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고, 이에 저항하여 봉기한 부마항쟁은 마침내 박정희 통치 18년의 1인지배 체제에 종언을 불러왔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궁정동 안가의 비밀요정에서 역순으로 총격을 가해 절명시켰다.
박정희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악의 뿌리는 함께 제거되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유재는 한국사회 도처에 겹겹이 쌓여있었다. 무엇보다 권력에 맛을 들여온 정치군인들이다. 하나회라 불리는 이들은 박정희의 친위사단에 속하는 정치군인들이었다. 이들의 존재로 하여 10ㆍ26사태 이후 '서울의 봄'은 곧 안개정국에 덮히고,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은 다시 불안감에 쌓였다.
장일순은 10ㆍ26사태에 비교적 담담했다.
자신의 청춘을 짓밟고 이상을 꺾고, 그것도 모자라 3년의 투옥과 가산을 털어 세웠던 학교를 빼앗기고, 교육사업에서 추방, 이후 사회안전법의 규제 등 그동안 당한 설움과 아픔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췄을 것이지만, 오히려 담담한 심경이었다.
장일순은 그 시기 세속의 권력자나 자신이 당한 고난과 같은 속사(俗事)에서 상당히 초월해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도사이거나 성인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정신적으로 그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묵혀 두었던 글씨를 다시 쓰게된 계기가 박정희 때문이었다고 술회할 만큼 마음의 넓이가 깊어졌다. 『노자』를 꾸준히 배우고 해월을 익힌 까닭일 터이다.
"내 맑은 난은 박정희로부터 왔지
(정란유래정희공:(淨蘭由來正熙公)
원한 관계를 원한으로만 생각하면 안 돼.
그렇게 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추해져.
박정희 씨가 아니었으면
내가 먹장난을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 게야.
박정희라고 하는 탄압이 없었으면
난초가 생길 수가 없잖은가? 그래서 내 난초는 박정희 씨 덕이다.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