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올린의 모습은 흡사 돼지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처럼 정육점을 연상시켰다.
Pixabay
3년 정도를 집 안에서는 비건¹으로, 집 밖에서는 페스코²로 채식을 실천하며 살았다. 놓치는 순간들도 많았다. 중간 중간 고기를 먹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집 안에서 '밥상머리 권력'을 가진 자라고 믿었다. 언제나 내가 먹고 싶은 순간에 내가 먹고 싶다고 얘기한 메뉴를 먹을 수 있었다.
1) 엄격한 채식주의자로 고기는 물론 우유, 달걀도 먹지 않음. 어떤 이들은 실크나 가죽같이 동물에게서 원료를 얻는 제품도 사용하지 않음(출처: 네이버 영어사전)
2) 페스코 베지테리안, 육류는 먹지 않지만 물고기와 동물의 알, 유제품은 먹는 채식주의자(출처 : 네이버 영어사전)
하지만 채식 선언 이후 내가 가진 '밥상머리 권력'은 반쪽짜리라는 걸 알게 됐다. 밥상의 메뉴를 결정할 수는 있었지만, 그에 필요한 재료와 조리 방법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된장찌개를 먹을 수는 있었지만, 멸치육수와 바지락을 쓰지 않은 비건식 된장찌개를 먹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외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싶을 만큼 절망적인 환경 안에서, 나는 조금의 '유도리'도 구할 수 없었다.
내가 채식을 하는 것은 이 사회가 돈이 되는 것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제기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이다. 이 때문에 고기를 소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채소를 소비함에 있어서도 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밖에도 일회용 쓰레기가 만들어지는 것,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을 나는 것, 말이 느린 사람과 일하는 것, 회의시간이 긴 조직에서 성과를 내는 것 등, 모든 귀찮은 것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하려고 한다.
소 한 마리가 맛 좋은 스테이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볼 기회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전처럼 자주 스테이크를 먹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것은 그사이의 긴 이야기들이 가공되거나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채식을 하면서 나는 자주 그 사이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길을 걷다가 예쁜 돼지 얼굴이 그려진 삼겹살집 간판을 마주하며 지워진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생각하곤 했다. 지워진 이야기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히 잊히고 만다. 이제 예쁘게 그려진 돼지는 돼지대로 행복한 삶을 살고, 삼겹살은 삼겹살대로, 목살은 목살대로 불판 위에 차려진다. 그사이 잘려나간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가축은 연하고 부드러운 살코기를 위해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여섯 달을 산다. 도축장에 끌려갈 때가 되어서야 제대로 서 있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그마저도 비틀거리다가 푹 고꾸라지고 만다. 도축장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시야에 보이지 않으니,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도축장 내부도 과정별로 잘 나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이 하는 일의 전체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노동자의 스트레스와 죄책감이 효과적으로 줄어든다.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가공되거나 삭제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궁금해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 소비에 동참하지 않기로 했다. 고기를 먹으면 공장식 축산 환경에 기여하는 것이고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그 옷이 생산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스다운 패딩 수십 벌이 촤르르 진열된 옷가게에 서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정말 맥 빠지는 일이다. 고개를 돌리면 플라스틱 섬유로 만든 패딩 수십 벌이 촤르르 진열되어 있다. 짐짓 선택의 기로에 선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