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등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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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다음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피해를 뼈저리게 당한 생명체는 고래일 듯하다. 서양과 일본이 저지른 약탈과 착취를, 고래들도 처참하게 겪었다. 인간 싸움에 고래등 터지는 정도가 아니라, 고래에 대한 제국주의의 직접적 약탈로 고래등이 터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처참히 짓밟힌 고래들을 또다시 긴장시킬 만한 뉴스가 지난 26일 나왔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내각 및 총리 보좌)이 국제포경위원회를 탈퇴하고 상업용 고래잡이를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뉴스가 고래들에게도 전해진다면, 분명히 적지 않은 충격을 줄 것이다. 일본 군사대국화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우려가 실현되기도 전에, 고래들이 먼저 일본 대국화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국제포경위원회는 무분별한 고래잡이를 규제하고자 1946년 창설된 기구다. 이 기구는 1986년부터는 상업용 포경을 금지했다. 싱어송 라이터 송창식이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라는 가사로 유명한 <고래사냥>을 지은 해는 1975년이다. 만약 11년 뒤였다면, 이 노래는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원자폭탄 투하로 패망한 지 6년 뒤인 1951년, 국제포경위원회에 가입했다. 당시로서는 부득이했을 것이다. 일본 역시 1986년부터는 상업용 고래잡이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대신, 남극해에서 연구조사를 명분으로 하는 고래잡이만 할 수 있게 됐다.
그랬던 일본이 32년 만에 입장을 바꿨다. 스가 장관은 "국제포경위원회 조약에 명시된 '포경 산업의 질서 있는 발전'이란 목적이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고래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과 입장이 공존할 가능성조차 없다는 게 유감스럽게도 명백해졌다"라면서 탈퇴 이유를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유는 아주 간명하다. 고래고기를 먹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릅쓰고 탈퇴를 강행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과거 상업 포경을 적극적으로 벌였던 지역의 눈치를 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경향신문>은 지난 26일 "홋카이도, 아오모리, 미야기현 등을 지역구로 둔 여당 의원들의 압박을 일본 정부가 수용해서 이뤄지게 됐다"며 "포경선의 거점이 있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는 아베 총리, 연안 포경이 번성한 와카야마현 다이지정은 니카이 자민당 간사장의 지지 기반"이라고 소개했다.
1945년 패망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극도로 조심해왔다. 한국 같은 나라들한테는 몰라도, 서양이나 백인 국가들한테는 최선의 예를 다해왔다. 그런 일본이 호주나 뉴질랜드 등의 반발에 개의치 않고 탈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1945년의 굴레에서 점점 벗어나는 일본 사회의 공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래에게도 끔찍했던 제국주의의 역사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고래고기를 좋아했다. 조선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에도 막부는 양국 간의 식습관 차이에 대해 신경을 썼다. 에도(江戶)는 도쿄의 옛 이름이다. '에도 막부'는 도쿄에 근거지를 두고 1603~1867년에 존립했던 쇼군(최고장군) 휘하의 무신 정권이다. 임진왜란(1592~1598년)의 충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무너진 결과로 생긴 정권이다. 두 나라 식습관 차이에 대한 에도 막부의 인식에 관해,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 게이오대학 교수는 '왜관과 조선통신사'란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리머니(통신사 접대)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많은 난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통신사가 내일(來日)했을 때 '결례가 되지 않는 식사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인데. 가까운 나라인데도 음식문화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물을 '네 발 달린 짐승'으로 부르고, 식사에 이것을 내는 것을 꺼린다. 조선에서는 소·돼지·양·사슴·개의 고기는 물론이고 내장과 대가리까지 식재료로 사용한다. 그러나 일본인이 좋아하는 고래는 오히려 꺼려해서 싫어한다." - 조선통신사학회가 2006년에 펴낸 <조선통신사연구> 제3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