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는 훈련병들.
공군 공감
문화비평가 최태섭은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책에서 '억울함'을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라 주장한다. 그는 모두가 소리 높여 자신의 억울함을 외치고 있는 한국 사회를 '억울함의 경기장'으로 비유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감정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억울함을 경쟁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지적했다.
책을 읽으면서 매우 뛰어난 통찰이라고 생각했지만, 억울함을 시대정신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약간 속된 말로 '오바'라고 봤다. 그렇지만 양심적 병역거부를 둘러싼 군 복무자들의 반대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정말 억울함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제1의 정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군 복무자들은 왜 억울해 하는 것일까? 청년 시기 사회와 단절을 겪어야 하는 시간 손실도 이유겠지만, 가장 핵심은 매우 가혹한 병영문화에 있다. 본인이 복무한 장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군대는 폭력에 관대한 조직이다. 아니, 관대하다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면에서는 '군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권유하는 것이 한국 군대의 어두운 단면이다.
최태섭은 이러한 복무 기억을 한국 남성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트라우마'로 설명한다. 군대의 가혹한 환경에서 지냈던 경험이 남성들로 하여금 피해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양한 방향에서 억울함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군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조로 매우 유명한 강화도의 작은 부속 섬에서 복무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때 기억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서해의 바다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위계질서 속 구타와 억압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례로 이병 시절 선임들에게 두 시간 정도 보일러실에서 폭행을 당하다 소대장을 맞닥뜨렸을 때 소대장이 남긴 "상처 나지 않게 잘하라"는 말은 지금도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두운 보일러실에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당하는 구타는 물리적 아픔보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고립감'이라는 공포로 기억된다. 지금은 잊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그때의 공포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자문해 보면 아무렇지 않았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의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그들의 반대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빌 클린턴이 조시 부시를 꺾고 대통령이 된 데에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economy)라는 구호가 큰 힘을 발휘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이를 적용한다면 "바보야 문제는 군복무자들의 억울함이야"가 아닐까.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군 복무자들의 억울함을 추적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양심적 병역거부자 또는 여성과 군복무자들이 억울함을 두고 경쟁하는 '고통 배틀'이 벌어지지 않는 토대가 될 것이기에 그렇다. 최소한 국가와 군 당국이 이 문제에 방관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는 그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하고, 군 복무자들의 피해에 연대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고통의 고리 끊을 용기를 기대한다
생각해 보면 일선 병사들의 인간적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비인간적 군대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군 자신이다. 병역을 마친 이들이 끊임없이 군대를 매우 가혹한 곳으로 회상하고, 계속하여 비인간적 처우에서 비롯된 사건 사고들이 발생할수록 사회적으로 군대는 더욱 기피되고 지속가능한 조직으로서의 신뢰를 상실할 것이다.
따라서 병영이 최소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은 군 당국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물론 정부와 군 당국이 알아서 과제를 해결해 주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 이슈는 많은 참고 지점이 된다. 최근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의 대중화로 인한 갈등과 전진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기존 남성 중심의 사회문화에 저항하고, 구조의 문제를 폭로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수면 아래 은폐되어 있던 다양한 이슈들이 공론의 장에 불려나오고 있다.
논쟁이 지속되고 있기에 그 결과를 짧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페미니즘'을 알지 못하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과거 쉽게 소비되던 '몰카 동영상'이 이제는 명백한 범죄가 되었고, 공개적으로 고정화된 성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점이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 전진은 문제에 순응하지 않고 고통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많은 이들의 용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용기가 군 복무자들에게서 나올 것을 기대한다. 용기가 나타날 수 있도록 양심적 병역거부에 찬성하고 합리적 대체 복무를 희망하는 이들이 군대 내 인권 문제와 군 복무자들의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 부당한 군대 내 인권이 나아지는 것을 억울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경험한 고통과 억울함을 딛고 고통의 고리를 끊어내자고 외칠 때 그때 우리 사회는 대체 복무의 징벌성을 두고 논하는 것을 넘어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라는 법원의 판결 취지를 실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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