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 제1회 공판 소식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20. 6. 9)제일 위 사진이 김마리아이며, 아래는 함께 구속된 황에스더, 이혜경이다.
동아일보
김마리아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부터 다시 항일운동에 뛰어든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회장에 선출된 것.
경성에는 3.1혁명 직후인 4월부터 독립운동 과정에서 감옥에 간 지사와 그 가족의 구호를 위한 조직으로 혈성단애국부인회(회장 오현주)와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회장 김원경)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3.1혁명의 결과 상하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면서 점차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여성들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오현주를 회장으로 조직을 통합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열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조직도 지지부진해지자 출옥한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세워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전국 조직으로 새롭게 만들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면서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불과 한 달 만에 6000여 원을 모금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김마리아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할 당시 어떤 생각으로 임했는지는 1919년 9월 자신이 작성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가족의 집이지만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성립하지 못하고 나라는 국민의 나라이라 국민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를 보존치 못할 것은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밝히 알리로다. (중략)
오호라.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로 본 회가 설립된 지 수년 이래로 적의 압박을 입어 어떠한 곤란과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은근히 단체를 이루며 비밀히 규모를 지켜 장래의 국가 성립을 준비하다가 독립국 곤란 중에 부인도 십(十)에 이(二 )가 참가하여 세계의 공안(公眼)을 놀라게 하였으나 이것에 만족함이 아니요,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기로 표준삼고 전진하며 후퇴하지 아니하니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함께 분거하여 이상을 상통할 목적으로 단합을 위주하여 일제히 찬동하심을 천만 위망하나이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마리아, 황에스더, 이혜경 등 3인이 작성한 본부규칙을 보면 된다. 특히 제2조 "본 회의 목적은 대한민국 국권을 확장케 함"이라고 정한 대목과 제28조 "본 회원은 회에 대한 일체 사항의 비밀을 엄숙히 지킴"이라고 한 대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928년 1월 동아일보에 <조선여성운동의 사적 고찰>을 게재한 견원생(필명)은 조선의 여성운동을 3개의 시기로 나눴는데, 제1기를 애국부인회 활동기로, 제2기를 여성동우회 활동기로, 제3기를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의 활동기로 나눠 설명한다.
1년 후인 1929년 <동아일보> 최의순 기자는 신년특집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한 '10년간 조선 여성의 활동'에서 여성운동의 역사를 배태기, 활약기, 침체기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창립에서부터 각 지방의 여성청년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배태기로 규정한다.
분류법은 다를지라도 두 기사 모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여성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제1기 또는 배태기의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도 이겨낸 '혁명 여걸' 김마리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전임 회장 오현주가 독립의 희망을 잃고 중국에서 돌아온 남편 강낙원의 영향을 받아 변절하면서 일경에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1919년 11월 일경의 탄압을 받아 간부들이 연행되면서 무너지고 만다. 이때 김마리아 역시 체포돼 종로서를 거쳐 대구로 이송된 후 다시 한 번 혹독한 고문과 함께 구속 수감된다.
정신여학교에서 김마리아와 함께 잡혀 대구로 이송된 애국부인회 서기 김영순(김마리아의 정신여학교 제자이자 당시 기숙사 사감)의 증언에 따르면, 김마리아는 이송되는 기차 안에서도 차분히 "우리가 지금 잡혀는 가지만, 그들이 알고 묻는 것은 대답하되, 모르고 묻는 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라면서 김영순, 장선희, 신의경 등 동지들의 각오를 다지게 하고, 심문과정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는다.
또한 웃으면서 "나는 몸이 약한 김선생이 제일 걱정스러워, 한 번만 얻어맞으면 다 말할 것 같아"라고 말해 김영순을 격려하기도 한다. 이에 김영순도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할 수 있었다.
김마리아와 동료들은 조직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조사과정은 물론 재판과정에서도 "인격수양과 여성교육을 보급하는 단체인데, 시류에 편승하려고 단체 명칭이나 취지서에 '대한민국'이나 '국권확장'과 같은 표현을 썼을 뿐"이라고 맞선다. 결국 연행된 52명 중 4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방면됐고, 핵심간부 9명만 기소된다.
왜성대에서 김마리아를 심문한 바 있는 가와무라(河村靜水) 검사가 대구로 옮겨오기까지 하면서 혹독한 수사를 벌인 일제는 안재홍의 대한청년외교단과의 관련성까지 캐내기 위해 김마리아에게 고춧가루를 탄 물고문을 실행했다. 심지어 성고문까지 자행한다. 이때 김마리아는 '너희가 할대로 다 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빼내리라'라고 되뇌며 이겨낸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3.1혁명 직후 구속되어 당한 고문후유증인 메스토이병이 악화된 데다 극도의 신경쇠약까지 더해져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놓인다.
결국 세브란스 의전의 스코필드 박사(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안장)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고문에 대해 직접 항의하는 등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병이 위중한 김마리아는 결사부장 백신영과 함께 보석으로 석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