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 마중나온 인파와 기쁨을 함께나눴다. 지 주교 뒤에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지학순 주교는 1974년 7월 23일 중앙정보부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서울 명동가톨릭회관에서 김수환 추기경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하지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면서 5개 항목으로 유신체제와 비상군법회의의 불법과 부당성, 무효를 주장하였다.
살얼음판과 같은 '긴조시대'에 중정의 출두를 거부하면서 유신체제를 원천적으로 비판한 것은 지 주교가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가 행한 '양심선언'은 이후 권력과 압제에 맞서는 시민들의 저항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많은 민주인사들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독재와 싸웠다. 198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광주였다면 1970년대 '민중의 성지'는 원주였다. 원주는 압제로부터 '해방구'가 되었다.
1974년 9월 24일 원주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발족되었다.
유신체제를 가장 강력히 비판하고 저항했던 정의구현사제단에는 당시 전국 800여 명이던 신부 중 500여 명이 참여할만큼 가톨릭의 지지를 받았다. 종교계에서 '정의(正義)'를 기치로 내건 것도 초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