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전희식
장일순이 포도농장과 함께 시작한 협동조합운동 그리고 지학순 주교와 가톨릭센터를 열어 벌인 각종 문화행사는 원주시민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들의 의식을 크게 바꾸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정신적ㆍ사상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는 간디와 비노바가 물레를 돌리는 행위 뒤에 숨어 있는 이념을 간파하였다. 물레질은 노동 가운데 가장 힘들지 않고 가장 단순한 노동이다. 이를 통해 인도인들에게 적어도 자신이 입을 옷을 스스로 만든다는 생각, 지극히 약한 사람도 생산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었다.
장일순은 맑은 성정도 그러하지만 어디서나 어떤 조직에서나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심없는 넉넉한 포용력으로 사람을 대하고 촌로와 같은 소박한 심성과 차림새는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그의 곁으로 모이도록 만들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구수한 숭늉과 같고 텁텁한 막걸리와 같다"고 입을 모은다.
3년의 징역살이와 포도농사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협동조합을 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키우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사유의 폭을 넓혔다. 파편화된 지식으로 무장한 현대형의 지식인이 아닌 산성화된 인간의 심성을 녹이고 함께 대화하는 지혜의 사람이 되었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늘 밑으로 기어라를 실행했다. 그는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실례에서 배워야 한다. 사회변혁의 정열 이외에 영혼 내부의 깊은 자성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일순은 지식인이랍시고 민중 위에 군림해, 민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줄곧 강조하였다. (주석 1)
경향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그의 곁을 찾았다.
마치 사람들이 더운 날이면 큰 느티나무 밑으로 모이듯이, 추운 날씨에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그는 소외된 이들을 품어 주었다.
곧으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유연한 모습은 '시대와 불화(不和)'하는 청년들에게는 기대고 싶은 교사이고 머무르고 싶은 안식처였다. 그는 차차 러시모어 마운틴의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 정의감에 없는 포용은 위선이거나 삿됨이지만, 그의 시침(時針)은 언제나 '참되자'는 지점을 가르키고 있었다.
우리나라 옛 역사에는 소되사상(蘇塗思想)이 전한다. 고대국가 단계에서 제의의 하나로 출발했으나, <위지(魏志)>에 따르면 "소도에 참석한 사람은 설혹 도망자(죄수)라 하더라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한다.(諸亡逃至基中 皆不還之…). 소도는 일종의 금기지역의 역할을 하였다. 고대 서양의 asylum과 같은 비슷한 일종의 신성지역을 일컫는다. (주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