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고상균 목사님
비온뒤무지개재단
-물론 성소수자 인권 활동에 자연스레 흘러 들어오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또 종교인으로서 목사님께서는 일찍부터 연대에 함께 해주셔서 계기가 없을 것 같지는 않아요. 혹시 성적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저한테는 두 가지 정도의 삶의 변곡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학사장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군 생활을 7년 정도 했어요. 그리고 중대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일을 했던 때가 있었는데 제 부하가 어느 날 저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친구는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고 굉장히 성실했습니다. 그리고 부대 안에서 상하관계나 친구관계나 매우 훌륭하고 자기의 후임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죠. 정말 멋진 친구였습니다. 저도 뭐 부하들 중에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만 정말 더 아끼는 병사였지요. 근데 그 친구가 어느 날 밤에 상담을 하러 와서는 '실은 제가 게이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순간에 마음속에서 제가 뒤로 싹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좀 전까지 '어이구 일로 와 일로 와' 이런 마음이었는데. 그 순간에 너무 놀랐어요. 그렇게 특별한 경험은 아니지만 대학시절 어줍지 않은 운동권이었던 저는 스스로 '진보적인 사람'이란 자부심 같은 게 있었어요. 근데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에 마음이 그 전과 달리 싸늘해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왜 이러지? 나는 도대체 뭐였던 거지? 그런 생각을 했죠.
이게 저도 모르게 제가 갖고 있던 마음속의 혐오를 발견한 계기였어요. 개인적인 문제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그 친구는 군 생활을 마무리 하고 싶어 했어요. 본인의 성적 지향도 이유 중 하나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면서 제가 두 번째로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 친구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 위해선 결국 성적 지향을 공식적으로 밝혀야했는데, 군 형법상 그는 그냥 범죄자가 되더라고요. 그 뒤로 군형법을 열심히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건 너무 비합리적인 거예요. 기가 막혔습니다."
-그 때의 개인적인 경험이 지금의 활동으로까지 이어지셨군요.
"그 때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제 마음의 무의식적인 혐오, 그리고 군이 갖고 있었던 혹은 군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갖고 있는 혐오를 아주 극단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였어요. 그러면서 나는 누구이고 내 정체성은 무엇이며 왜 내 마음속에 혐오가 있었나를 생각했죠. 성소수자들이 나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그리고 사회는 왜 혐오하는가. 이것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신학을 공부했고 제 방법론은 신학적 해석학이니까 이 모든 게 결국 신앙적 고민으로 연결되었어요. 내 신앙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 고민을 가지게 되면서 반성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2007년의 차별금지법 정국에서 법무부가 제출한 법안이 누더기로 엉망진창이 되었다가 폐기가 됐잖아요. 그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게 다수의 개신교 단위였죠. 보수 개신교 단위가 대놓고 혐오를 했어요. 그런데 그 때 언론을 봤을 때 보수 개신교계의 목소리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이건 너무 너무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때 저는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라는 곳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무작정 찾아다녔어요."
-그 때는 지금보다도 더 성소수자에게 연대하는 종교인이 적었기도 했고 이 문제 자체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함께하는 사람을 구하기 더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외면을 당한 곳도 많았어요. 이 문제에 함께 대응해야하지 않겠냐고 그러면 관심 없다는 답이 돌아왔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시에는 향린교회 부목사로 계시던 임보라 목사님을 포함해 몇몇의 개인과 단체를 만나 연대를 형성할 수 있기도 했죠. 이를 바탕으로 개신교에 혐오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연대단위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12월에는 차별하지 않으시는 야훼라는 이름으로 세미나를 개최했어요. 이때의 논의를 기반으로 2008년에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인 연대(약칭 차세기연)'이 출범이 되었고요.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제가 군복무중 가졌던 고민이 드디어 땅에 닿게 되는 것 같았어요. 이후에는 우리가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그리고 교회 현장에선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를 고민했죠. 특히 교회에서 아이들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할 때 이성애중심적인 내용이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거나, 결혼을 이성간의 결합으로만 이야기 한다거나하는 것이지요.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학교에서 이런 교육을 받고 오는 친구들은 교회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성 신학, 퀴어 신학, 인문학, 맥주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만큼 목사님이 연대를 위해 찾은 현장도 폭넓었다. 사전 조사를 하며 목사님이 소수자들을 위한 다양한 싸움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맞이하고 이를 통과해온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연대를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함이 들었다. 어쩌면 그 답이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앨라이가 되려는 사람에게 큰 격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연대는 아름다운 일이라고는 하지만 또 핍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하기에 험난하기도 하죠. 목사님께서는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철거민들 편에서도 함께 연대를 하셨고 그 과정에서 큰 충돌 속에 부상을 입기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두려움을 돌파하고 끝까지 함께 하실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돌파했다는 표현은 저에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냐면 사실 전 겁이 되게 많거든요. 그리고 의지가 강하고 사명감이 투철해서 뭔가를 이끄는 그런 부류도 아니에요. 사실 그 자리에서도 너무 무서웠고요. 이게 상황이 어떻게 되었냐면 명동에 카페 마리라는 가게가 한창 철거문제를 겪던 때가 있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그런 곳에는 용역들이 들이닥쳐서 행패를 부리고 그러는데, 그 날도 용역들이 난입해서는 사장님을 끌어내고 길에 패대기를 치고 그랬죠. 그래서 그분이 다쳤어요. 다치셨는데 가게에서 나가면 안 된다고 버티신 거예요. 그러다 실려 가셨고.......
그래서 제가 있던 교회 담임 목사님이랑 교인 분들이 가서 항의를 하고 용역들이랑 대치를 하게 된 거죠. 그 주변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향린 교회 교인들이 몰려왔고 저도 함께했죠. 그래서 용역들이 당황을 했죠. 일요일에 아무도 없으니까 빨리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디서 이상한 사람들이 왔으니까요.(웃음) 용역들이 굉장히 강하게 밀어붙였어요. 사실 무서웠죠.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고 저는 조금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하는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으셨던 이유가 있으신가요?
"다른 건 아니고요. 아까 말씀드렸던 그 누워계신 분, 그냥 그거였습니다. 제가 서서 그 용역과 대치를 하고 있는데 다치신 사장님이 바로 뒤에 누워계셨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그 자리를 빠져나가면 그 분이 바로 용역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잖아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그걸 연대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정말 컸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었죠. 이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는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그러잖아요. 전능, 그러니까 엄청 능력이 많죠. 전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순간에 엄청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용역이잖아요. 두드려 맞는 쪽이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은 용역 쪽에 계실 가능성이 크죠. 근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어요. 하나님은 그 순간에 그 누워계신 사장님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가서 그 곳에서 고난을 받고 계실 거니까, 그것이 저의 신앙이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시는데 믿는 이들이 떠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남았습니다. 결국 용역과 부딪혀서 충돌하기도 하고 갈빗대가 금이 가기도 했지만요.
그 뒤로도 싸움은 수 일간 이어졌습니다. 교회가 근처니까 지나가면서 용역 깡패들이랑 매일 싸우면서 출근하고 싸우면서 퇴근하고 이런 상황이 이어졌죠. 하지만 그 순간마다 누워계신 그분의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 현장과 분리될 수는 없었습니다."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하셨기에 계셨던 곳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함께 연대했던 사람들도 많으셨을 것 같고요. 기억에 크게 남았던 인상적인 순간 혹은 힘을 얻거나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이신가요?
"말씀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떠오르네요. 그 중에 하나를 정하자면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들겠습니다. 알고 계시듯이 유성기업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이유로 일 하시던 분들을 쫓아냈죠. 그리고 오랫동안 싸워서 부당해고였다는 결정을 받아내서 다시 복직을 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말도 안 되는 빌미를 잡아서 또 해고시켰죠. 너무 안타깝죠. 그래서 또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죠.
그런데 그렇게 오랜 투쟁을 이어나가시는 노동자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지만 정신적 어려움도 크게 가지게 되요. 고립감, 고독함, 그리고 이 싸움 우리가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죠. 그리고 직장에서 쫓겨난다는 건 단순히 일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해요. 함께 일했었던 노동자들과 연락을 못하게 되니까요. 외로워지겠죠. 그래서 이 당시에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그중에 수년 전에 한 분이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을 알리고자 유성기업 노동자분들께서 서울 광장에 와서 분향소를 조그맣게 설치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조차 서울시와 경찰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뭉개버렸어요. 차양을 설치하거나 이런 건 거의 바라지도 않았어요. 깔개 있잖아요. 그걸 깔고 앉아있으면 몸을 밀어트린 다음에 깔개를 뺏어가고 이랬어요. 비가 오는 날에도 그런 지경이었어요. 그러다 제가 일했던 교회에서 사회선교를 담당하는 부서가 이 현장을 발견하고 함께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몇몇 분들이 그 곳에서 당하는 고난들을 저희에게 알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이 이렇게 아파하신다고."
-아직 이야기를 전부 듣지는 못했음에도 얼마나 급박하고 열악한 상황이었는지 느껴집니다. 이후의 과정도 녹록치는 않았을 것 같아요.
"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밀고 들어오면 맞서서 싸웠고요. 저도 그랬지만 교우들과 목회자들 중에 여러 명이 다치기도 했습니다. 안경이 박살나거나 앰프 같은 장비가 파손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계속 싸워나간 끝에 조그만 분향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교인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기 위해 남대문 경찰서 앞에 수백 명이 모여 기도회를 연 후, 시청 앞 분향소까지 행진을 벌였죠.
그날 보슬보슬 비가 왔었습니다. 분향소에 가서 교인들과 제가 분향을 드렸죠. 그때 그 과정에 참여했던 노동자분들과 자리를 지켜내셨던 시민사회 활동가분들이 정말 많이 우셨어요. 거기서 그분들이 저에게 말씀해주셨던 것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그 자리에 오랜 시간 계셨거든요, 서울에 올라와서 거의 2주 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제대로 조문을 받아본 적이 없으셨다고요. 분향소를 열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이 자리를 지켜주고 그래서 외롭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셨어요. 정말 너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뭉클했어요. 그때 저희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이 싸움에 우리가 계속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교우 중에 어떤 분들은 집회를 매주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락을 싸가서 식사를 나누기도 했죠. 그렇게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조금이나마 함께했어요. 언론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결국은 최근에 유성기업 노동자분들이 겪은 일이 부당했다는 것이 대법원 판결로 나왔죠. 아직은 더 싸워야 되지만 그렇게 작은 승리들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제가 한 일은 아니고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이었고 보람 있게 느껴졌어요."
-다른 목사님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드리는 이야기지만 한국에는 지금 성적소수자의 편에 서는 종교인들의 존재가 절실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 사례에서 보듯 성소수자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 교회나 관련기관에서 억압하고 배제하는 분위기가 있죠. 그래서 종교인들이 자기 소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고요.
"사실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든 게 저를 포함한 종교인들이 했던 잘못입니다. 제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 점에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먼저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개신교에는 전 세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는 하나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교회든 아프리카 대륙의 교회든 우리는 하나의 교회인 거죠. 즉 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 사실 그건 남의 일이 아니에요. 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개신교가 극단적인 혐오발언을 하고 있다면 사실 그건 제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절대로 제가 어떤 권위를 갖고 있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네요."
-그런 상황에서 최근에 든 생각은 그런 분들이 자괴감에 빠져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조차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더 많이 다른 소수자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내가 용기가 없어서 내가 못나서 이러고 있다고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수는 강고하고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소수인 어떤 존재는 굉장히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 한다고 해서 크게 세상이 바뀌지도 않죠. 사실 굉장히 힘들게 무언가를 해도 남는 결과가 없으면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뒷감당은 나 혼자 해야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린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힘 있는 존재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정리해주면 좋겠죠. 집회에서 앞에 막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을 어떤 존재가 싹 쓸어버려준다던가 하는 것이요. (웃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일정 부분 폭력이 발생할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던 가치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작은이들이 함께 모여서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가치잖아요. 강력한 한 사람이 나서서 정리하는 그런 방식은 우리가 취하지 않잖아요. 즉 우리는 영웅이 아니고 더불어 영웅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은 주저하지만 성소수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예비 앨라이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연대란 말 너무 어렵잖아요. 그리고 어떤 집단을 지지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죠.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요. 친구가 되어보는 것,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친구가 된다면 우리는 친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울 수 있고요.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는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죠. 연대는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다면 좋겠죠.
체 게바라가 그런 얘길 했죠. 이 세상에서 불의가 저질러질 때마다 함께 분노할 수 있다면 당신과 나는 동지이다. 가령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혐오집단이 방해와 폭력을 저질렀을 때, 많은 이들로부터 그렇게 옳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했어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보냈죠. 그렇게 세상이 정의로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 걸 우리가 느낄 수 있다면, 사실 그런 현장에서 겪었던 아픔이 또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연대라는 말이 어렵다면 우리 친구가 됩시다. 저도 친구가 되려고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재밌게 무언가를 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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