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8%의 표차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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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실시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는 등 야당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때를 전후하여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 실미도난동사건, 사법파동, 서울대 교수 600여 명의 학원자주화운동, 공화당 비주류 항명파동, 수경사 장병들의 고려대 난입사건, 전국대학생 5만여 명 고대난입군인 처벌하라는 시위 등 굴욕회담 반대시위 이래 처음으로 도처에서 반정부시위가 전개되고 각종 사건ㆍ사태가 일어났다. 그동안 박정희 정권의 은폐되었던 부정부패가 폭로되고 민심의 이반현상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심을 수렴하거나 국정의 민주화 조치보다 더욱 탄압과 압제 쪽으로 치달았다. 학생시위 진압용으로 위수령발동(1971. 10. 8), 시위주동학생 174명 제적(10.18), 국가비상사태선포(12. 6)에 이어 사실상 유신의 전조격인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