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내가 부품에 무언가를 끼는 것을 가만히 쪼그려 앉아 보고 있으면 엄마는 나에게 "해볼 거야?"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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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디 좁은 우리 집에는 그때의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부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것들은 내가 큰 방에서 작은 방을 지나갈 때, 작은 방에서 화장실을 향할 때 자꾸만 발에 치어 많이 따가웠다.
"엄마 뭐해?"
"응. 부업해."
부업이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똑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임을 어린 나는 일찍이 눈치 챘다. 내가 커갈수록 엄마의 부담도 커져 갔을 것이다.
아빠는 동트기 전에 집을 나가 해가 지면 집에 왔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을 했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엄마의 상황과 배경 속에서 '직업'이라 불릴 만한 일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엄마가 부업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어릴 적 나는 빈혈이 심해 앉았다 일어나면 머리가 항상 핑 돌았다.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나는 내 방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는데 순간 앞이 하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바닥에 엎어진 채로 있었다.
왼쪽 턱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놀란 엄마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왼쪽 턱이 좀 찢어졌고 내 옆에는 엄마의 부업 부품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내가 그 위로 쓰러쳐 턱에 부품이 박혀 찢어진 것이었다. 그때 찢어진 건 내 얼굴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아직도 내 왼쪽 턱에 찢어진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내가 그때 부업만 안 했어도 우리 딸 예쁜 얼굴에 상처가 없었을 텐데..."
내 상처는 엄마의 부업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찢어진 턱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어린 내가 부품에 무언가를 끼는 것을 가만히 쪼그려 앉아 보고 있으면 엄마는 나에게 "해볼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응!"이라 대답하고 그 부품을 만지작거리며 엄마 옆에서 놀았다.
장난감 대신 부업 거리를 가지고 노는 어린 자식을 보며 그때의 엄마는 무슨 마음 이셨을까. 그렇게 엄마가 하루 종일 부업을 해서 받은 돈은 겨우 몇 만 원이었고, 아빠가 하루 종일 노동을 해서 받은 돈도 겨우 몇 만 원이었다. 왜 엄마와 아빠는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겨우' 였을까.
아빠의 직업과 엄마의 부업이 지금의 나를 키웠는데 나는 그 직업과 부업이 참 서러웠다. 아빠는 매일 노동을 반복했고, 엄마는 계속 동작을 반복해 몇 만 원을 받았는데, 나는 그 몇 만 원의 수당이 참 서글펐다.
'뭐라도' 해야 했던 엄마의 지난 시간들이 그저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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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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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야했던 엄마, 그 시간들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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