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신광초등학교병설유치원(원장 오임석)의 아침 풍경은 조금 색다르다. 모든 유아들이 등원하고 아침 책 읽기를 마친 오전 9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안전교육이 시작된다.
정세연
주중이고 주말이고 담임교사가 가정 방문하듯 직접 찾아가 묻고 또 살폈다. 집과 가까운 곳은 썩 내키지 않았고, 괜찮은 곳이다 싶으면 집에서 너무 멀었다. 이른 출근 시간에 맞춰 문을 여는 곳도 많지 않았고, 퇴근 시간이 늦다고 하면 이내 표정이 어두워지며 손사래를 쳤다.
고백하건대, '적어도 둘은 낳아야 본전'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따랐던 걸 후회했던 적도 있다. 아침마다 첫째를 차에 태워 초등학교에 등교시키고, 둘째를 유치원에 실어 보내야 하는 일상은 맞벌이 부부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딸린 병설 유치원이 있었지만, 거긴 누구 말마따나 '3대가 덕을 쌓아야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왜 초등학교엔 있는데, 중고등학교에는 병설 유치원이 없을까?"
등하교와 등하원을 책임지다시피 한 아내의 독백 같은 푸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학교마다 유치원에 자녀를 맡겨야 하는 젊은 교사들은 있고, 남는 교실 또한 적지 않을 텐데, 왜 유치원으로 개조해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직장 내에 어린이집을 설치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그다지 낯설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현실성을 타진하기 위해 구청과 교육청, 유아교육과가 설치된 지역 소재 대학을 차례로 찾아갔다. 민원인의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으로 여겼던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나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말했다. 전체 교직원의 동의와 학교장의 결단만 있으면, 일정 부분 예산 지원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답변도 들었다.
대학의 담당자는 설치 후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자상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중고등학교의 학사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어 가급적이면 독립적인 건물이어야 하고, 급식소의 운영 방식에도 융통성일 필요할 것이라는 등의 조언을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원아들이 지속적으로 확보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거라며 꼼꼼한 준비를 당부했다.
반색까지는 아니어도, 동료 교사들은 대체로 제안에 호응했다. 개중에는 실현될 수만 있다면 결혼과 출산을 앞둔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최고의 복지 제도가 될 거라며 반기는 이도 있었다. 한 학교만으로 수지타산 맞추기가 어렵다면, 인근의 학교들과 묶어 운영할 수도 있을 거라는 현실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기도 했다.
학교장의 결단만 남은 상태였다. 지금껏 운영 사례들을 모으고,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던 조언들을 자료로 묶어 학교장의 최종 승인을 얻기 위해 결재라인을 밟기로 했다. 우선 교감 선생님을 만나 구두로 취지와 기대 효과 등을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설명했다.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뿔싸. 연세가 지긋하신 교감 선생님은 '간절함'에 공감하지 못하셨다. 한 달 가까이 짬을 내 어렵사리 챙겼던 자료는 애초 꺼내 보여드리지도 못했다. 그에게 실현 가능한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거다. 외려 짧은 외마디 말로 간청을 무질러버리셨다.
"우리 때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같은 돌봄 시설 하나 없이도 아들 딸 네다섯씩 낳아 잘만 키웠네."
학교장의 결단은커녕 교감 선생님의 벽조차 넘지 못하고 야심찬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혼이라도 난 것처럼 풀이 죽어 나오는데, 동료 교사들이 다가와 시기상조라거나, 잡무가 늘어나게 될 거라는 등의 위로의 말을 한 마디씩 건넸다.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따금 '힘들게 아이들을 키워봐야 어른이 된다'는 충고도 들었고, 심지어 '자기 좋자고 학교에 부담을 준다'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술자리에서 오간 뒷담화라 정년을 앞둔 선배교사들의 반응이었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고, 어느덧 두 아이는 '혼자서도 잘 하는' 나이가 됐다.
세월이 흘러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한 후배 교사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다. 학교 내에 어린이집을 마련하자는 요청도, 구청과 교육청의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도, 인근 학교와 묶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한결같았다. 그 역시 어린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애를 태웠고, 나름의 대안을 찾아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절박한 입장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선뜻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 커버린 마당에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과거 교감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무릎 꿇었을 때 애써 모른 척했던 후배 교사들에 대한 보복 심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지질함'은 당시 교감 선생님이 나의 '간절함'에 공감하지 못하고 요청을 무질러버렸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당장의 이해관계를 떠나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면, 먼저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어야 옳다. 아무튼 방관했고, 그의 바람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박용진 3법'을 가능케 하기 위한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