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받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재판받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위당 사람들 제공
장일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노역이 없을 때는 열심히 책을 읽었다. 동서양의 고전을 주로 읽었다. 고전 외에는 차입이 안되기도 했지만 오래 전부터 이런 책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어 원서로 된 진보사상 관련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면회 온 아내에게 목록을 적어주면 다음 면회올 때 가져왔다. 형무소 관리들이 영어를 잘 몰라서 차입이 가능했다.
무위당은 평생 책을 가까이 한 독서인이었다.
3년간 감옥에 있을 때 사모님이 면회 오면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적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중에는 영어로 된 원서도 있었다. 원서로 된 서적은 주로 사회개혁에 관한 진보적인 내용이 담긴 것으로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옥바라지를 하는 사모님이 서울 종로에 있는 외국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에서 어렵게 구해 감옥으로 전달했다. 이런 책이 한글로 써 있었다면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반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형무소에서 영어로 된 책이니 문제없겠다 싶어 통과시켜주었고, 때로는 묵인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주석 1)
정치적 격변기에 장일순은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많은 독서를 통해 바깥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지식을 취득하였다. 그래서 출감 후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부르기도 하고, 무료 국립대학생이라 자조할 때도 있었다.
장일순이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정치일선에 나섰다.
1962년 3월 24일 윤보선 대통령이 물러난 자리까지 꿰차고 명실공히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이 해 12월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만들고, 이듬해 2월 민주공화당을 사전조직하여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장면 정부를 부패 정권으로 몰아 타도한 군부세력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정치를 자행하는 한편 4대 의혹사건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말이 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