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해방운동사에서 마산을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김명시
지앤유
열여섯 명의 주인공들 중 독자들에게 가장 소개하고 싶은 이는 김명시 장군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나 열여덟까지 살았으며 러시아를 거쳐 중국 대륙과 만주벌판을 무대로 민족 해방을 위해 싸웠던 독립 운동가이자 사회주의혁명가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3.1만세운동 때 얻은 부상 후유증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쟁에 뛰어들어 무려 12년이나 일제의 감옥에 갇혔던 김형선이 오빠였고, 1930년대 부산과 진해에서 적색노조운동을 이끈 김형윤이 남동생이었다."(본문 중에서)
고향을 떠나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고, 스물여섯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7년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와 1939년부터 팔로군에 입대하여 대륙을 누볐답니다.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여 김무정 장군과 함께 해방이 될 때까지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볐다고 합니다.
흔히 여성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남자들을 뒷바라지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김명시 장군은 남자와 꼭 같이 총을 쏘고 훈련 받고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여성부대를 따로 조직하여 지휘한 여장군이었다는 겁니다.
영화 <암살>을 통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전설 같은 투쟁이 꽤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흔한 이야기는 아니지요. 최근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소개한 여러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도시의 사람들>이 가진 특별함은 바로 아래와 같은 인용문에 있습니다.
"김명시는 1907년 동성리 189번지(오동동 문화광장 무대 자리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략) 김명시가 살았던 때의 동성동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예전에 그 많았다는 요정도 지금의 아구찜 식당도 당시에는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나지막한 초가 사이로 거미줄처럼 얽힌 좁고 굽은 흙투성이 길뿐이었다. (중략) 소녀 김명시가 책보자기를 등에 둥치고 집과 학교를 오갔던 길은 어디였을까? 김명시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700여 미터, 소녀 걸음으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본문 중에서)
저자는 김명시가 살았던 동네와 흔적에 주목합니다. 어떤 역사학자도 '소녀 김명시의 등굣길'을 상상해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독자들은 100여 년 전 김명시의 등굣길을 따라가면서 당시 마산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다섯 쪽 가까이 이어지는 김명시의 등굣길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100여 년 전 마산 도심의 입체적인 모습과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보면 마산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 역사에까지 닿습니다.
김명시가 6학년으로 편입했던 그 해 봄에 마산공립보통학교에는 이원수가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서로 얼굴이라도 익힌 사이였을까?"
허정도가 이끄는 김명시 이야기는 해방 후 동지들과 함께 봉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온 귀국길도 쫓아갑니다. 그리고 4년 뒤 부천경찰서 유치장에서 "수도 파이프에 자신의 치마를 찢어서 걸어놓고 목을 걸고 앉은 채로 자살했다"는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언론인 정운현도, 역사학자 강만길도,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운동사에서 마산을 대표할 수 있는 단 한 명을 꼽으라면 바로 김명시 장군이라 했답니다. 하지만 지금 마산에서는 그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란'을 찾아가는 시인 백석의 마산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