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벽보 - 녹색당 신지예와 선거 포스터
프로파간다
책에서도 이야기하지만, 모 인권변호사라는 사람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녹색당 신지예의 선거 포스터를 보고 '개시건방지다'라고 말했고,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그 발언 하나로 뒤집어졌다.
이 포스터 아트 디렉션을 맡았던 '햇빛 스튜디오'의 박철희와 박지성 디자이너의 얘기를 들어보면, 딱히 어떤 논란을 일으킬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녹색당이 페미니즘 의제를 서울시장 선거에서 어떻게 더 잘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변호사의 감정적인 반응도 꽤 의외라고 했다.
"한편으론,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글자랑 나이 든 후보들 사진 사이에 젊은이가 당당하게 턱을 들고 있는 모습 때문에 건방지게 느꼈을 수 있지만 사진 자체는 잘 모르겠다. 건방진 느낌이 있는 건지. 다만 저 사진은 왠지 옆을 보면서 나랑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것처럼 보이고, 되게 자신감에 찬 느낌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들어도 거품 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고 있어서 애당초 공격이 많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 변호사님 반응은 그중에서도 좀 특이했던 것 같다. 논리적으로 '이 포스터에는 뭐가 결여되어 있다', 아니면 '너무 나이브하다' 같은 식이 아니라 '찢어 버리고 싶다', '건방지다' 하는 식으로 화풀이하듯 쓴 것이 의외였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여덟 글자는 아마 한국 선거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키워드로 남게 될 것이 분명하다. 박지성 디자이너의 말을 빌리면,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운 후보가 등장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니까 말이다.
이후의 인터뷰이들 역시 이전에도 페미니즘에 대해 일상의 실천에서 생각해 왔던 예술가들에 가까워서 그런지 '이전에 없던 후보와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포토그래퍼 김현성은 환경과 생태를 다루는 잡지 <오보이!>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녹색당이 하는 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현재 녹색당은 하승수씨와 신지예씨가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과 영화감독 임순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문제가 된 '표정'에 대해서는 역시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 반감을 불러 일으킨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접근을 했다.
"나는 그 표정이 정말로 편하고, 부드럽고 자신감 넘치고, (좋지 않은 표현일 수 있지만) 정치인의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시민들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중략) 페미니즘 이슈가 이렇게 부각되는 시기가 아니었다면, 혹은 후보가 페미니즘 구호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사진 자체는 이슈 거리가 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지예 후보가 페미니즘을 주창하면서 출마했고, 그게 페미니즘에 불만을 가진 일부 대중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에 반감을 일으키면서 화제가 된 것이 아닐까? 단지 후보의 주장에 시비걸고 싶은 사람의 눈에는 그 표정이 마음이 들 리 없었겠지."
신지예가 보여준 어떤 가능성
선거 기간 동안 페이스북에서 그런 의견을 자주 접했다. 녹색당은 여성주의 정당이 아닌데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구호는 너무 불편하다는. 심지어 녹색당에 몸 담은 지 좀 된 일부 당원들도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 '여성주의 정당'이라는 것도 불분명하다. 여성주의를 앞에 내세우지 않으면 여성의 인권에 대해 중요하게 논의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 녹색당은 '평등문화 약속문'까지 만들만큼 평등이라는 의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페미니즘을 앞세우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게 없는 셈이다. 당시 녹색당 서울시장 선거 캠프 홍보국장을 맡았던 이은정씨 역시 당 내외로 제기되었던 이런 논의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혐오와 폭력이 이제 막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보는 무력감이 있었다. '아무도 안 한다면 우리가 하자'고 했다. 새로운 여성 정치인의 등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 (중략) 페미니즘을 전략적으로 내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녹색당이 워낙 생태 이미지가 강하지 않나, 그런데 '왜 갑자기 페미니즘인가'란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후보가 단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성차별 타파와 관련된 것이라는 걸 어떻게 유권자에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부담감이 선거가 끝날 때까지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을 바꾼 벽보>는 인터뷰집이기도 하지만, 포스터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다. 한 변호사의 말이 나비효과가 되어 SNS를 뒤집어놓고,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포스터가 훼손당하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2018년을 되돌아볼 때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인 안소현은 포스터에 대한 일련의 비판들의 공통점을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적인 것'을 보지 않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한다"는 것으로 꼽았다.
이들이 하나같이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지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후보에 대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바로 그때 표정, 스타일, 색 등 조형적 요소들은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에 논의의 효과적인 마침표로 기능한다. 정책이 아닌 인물과 이슈만으로 선거를 치르려 한다는 비판에서도 놀라운 것은 '페미니즘'을 정책의한 방향일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한국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고 나서도 이런 선거 포스터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올해서야 불붙은 것은 그만큼 여성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제를 선거라는 공적인 이벤트에 내놓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책은 역대 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들의 포스터를 아카이빙 해놓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상당히 많은 여성 후보가 '엄마' 혹은 '명예남성'의 이미지를 부각했다는 것이다. '엄마처럼 따뜻한 정치'를 한다거나, 반대로, '여성답지 않은' '대장부'의 이미지를 드러낸다거나.
어쨌거나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는 언제나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오롯이 반영해왔다. 결국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그런 전통적인 시선을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를 좋지 않게 봤던 가부장적 시스템이 만들어낸 것 아닐까?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을 의식한다. 그래서 유권자들에게 불편함을 안겨 주지 않는 '안전한' 선거 벽보를 만든다. 남녀 불문 이 시선의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그 시선은 이중적 억압 속에서 교환된다. 일상에서 그리고 정치라는 가상공간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자의 위치에 선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소화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친숙한 여성상이 개입되고, 친숙한 만큼 가부장적일 수 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관념과 이미지가 삽입된다.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
세상을 바꾼 벽보 - 녹색당 신지예와 선거 포스터
프로파간다 편집부 지음,
프로파간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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