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맥도날드 라이더
녹색전환연구소
'폭염수당'에 모였던 관심을 '라이더 유니온'으로 이어가기 위해
- 폭염으로 들끓던 여름이 지나가고 벌써 겨울이다. 겨울은 미세먼지와 한파가 기승이다. 지난 여름 "폭염수당 100원" 피켓을 들고 진행했던 1인 시위가 연일 대서특필 되면서 많이 알려졌다.
"언론보도가 너무 내 개인에게 집중된 탓에 미안하기도 했다. 의제를 개인이 독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의제를 위해서도, 개인을 위해서도. 언론에 나오는 것은 기사 한 줄도 소중한 기회다. 언론 등으로부터 내가 받은 관심에 응당 이 운동을 꼭 이어 가야겠다는 책임의식을 많이 느꼈다. 그러면서 운동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현재는 '라이더 유니온'을 준비 중이다."
- '라이더 유니온'이 그냥 나오진 않았을 것 같다.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궁금하다.
"주로 사회운동을 했다. 고등학교 때 청소년운동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한 것뿐인데 선생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학생회장 선거까지 나갔다. 그때도 많은 선생님들이 말렸다. 암암리에 정해진 학생회장이 있는 상태였다. 나처럼 가난한 학생은 후보 출마도 어려웠다.
내가 끝까지 굽히지 않으니까 내 출마를 막기 위해 학부모 운영위원들이 우리 집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근데 웃겼던 건, 그들이 자기네가 다 들어갈 수조차 없는 우리 집 상태를 보고 이런 집에서도 학생회장 후보가 나온다는 사실에 감탄하면서 돌아갔다는 거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출마할 수 있었다."
권위에 대항하고 불의에 맞섰던 패기가 주변의 지지를 불러내
- 최근의 숙명여고 사태도 떠오른다. 선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압도적으로 이겼다.(웃음)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친구들도 길거리에서 누가 괴롭히면 말하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 내가 왜소한 체격이다 보니 겉으로 봤을 때는 그냥 별 볼일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근데 그런 작은 애가 선생님한테 할 말 다 하니까 친구들이 멋있게 봐 주더라.
대학에서도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졸업 후엔 서울로 이주해서 사회운동을 이어갔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2014년 4월에는 양심적병역거부자로 감옥에도 다녀왔다. 이때 법무부가 나를 집시법 위반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공안사범 취급을 해서 좀 편히 지냈다. 재소자 사이에선 범죄내용으로 서열이 나뉘는데 공안사범은 급이 높았다.
남고에서는 선생님과의 관계를 지켜보던 아이들의 눈이, 감옥에서는 공안사범을 특별 관리하는 교도관을 지켜보던 재소자들의 눈이 있었다. 내가 남초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보다 더 큰 권위에 대항한 것이 남자들에게 일종의 남성성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인 것 같다."
- 청소년운동이 사회운동으로, 그리고 노동운동으로 이어져왔다. 그럼 라이더로 일한 것도 노동운동의 일환이었나?
"알바노동운동은 '알바연대'를 만들면서 시작했다. '알바노조 위원장'을 하기도 했다. 근데 운동을 오래 하다 보니 내가 어느덧 조직의 위계질서 속에서 선배이자 리더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기득권이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판도 많이 받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운동으로만 대했던 노동을 직접 실천하면서 부딪혀보고 싶어 라이더를 시작했다. 어렴풋이 라이더 노조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4대보험'이 가능한 일자리 만들기였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처음엔 막막함이 컸다. 다들 노조에 너무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축구모임을 만들었는데 거기엔 사람들이 잘 나오는 거다. 그래서 축구를 매개로 업무환경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나중엔 점장에게 얘기해서 업무환경 개선을 이뤄냈다. 사람들도 직접 겪기 시작하자 조금씩 바뀌었다.
맥도날드 라이더는 2년간 일하면 자동으로 무기계약직이 된다. 그래서 나도 일을 시작한지 2년째 되는 2019년부터 본격적인 라이더 노조활동을 시작하려 그랬다. 근데 올 여름 너무 더워서, 도저히 내년까지 참을 수 없어 피켓을 들었다.
시위 첫날엔 아무 반응도 없고 조용히 지나가나보다 했는데 그날 밤에 첫 기사가 나고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 기자들이 '오늘 시위 하냐'고 물으면 계획에 없어도 나가야 했다. 계속 기자들에게 연락이 오니까 쉬는 날에 쉴 수도 없었다. 그 시위는 알고 보면 기자들이 날 견인시킨 거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