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인 임보라 목사님
비온뒤무지개재단
- 본격적으로 앨라이 활동과 관련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계기가 있으셨나요?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독교계가 워낙 반대하던 시기에 젊은 기독교 단체 실무자분들이 오셔서 '기독교가 왜 이렇게 반대하는 것으로 비춰져야 되냐, 우리가 그런 목사들 아닌데'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렇죠, 기독교가 다 반대하는 거 아니죠, 차별금지법 제정 되야죠' 라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아요.
또 인상 깊었던 기억이 2008년에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찬반 토론을 하고나서 성소수자 기독교인 모임이 추진되었고 그게 성사가 됐어요.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어떤 분은 교회에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시는데, 어떤 분은 쫓겨나서 되게 고통스러웠다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성소수자 기독교인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던 거죠.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에 성소수자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철썩 같이 어떤 신앙처럼 신봉하는 그런 생각이 다 깨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 순간에."
- 보통은 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를 보아도 서슴없이 연대에 나서기는 어려운데요, 목사님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셨는지 질문 드려도 될까요?
"사실 초등학교 때 저희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요, 우울증으로 심하게 몇 년을 고생하시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셨어요. 동네에서 계속 살면 뭐랄까 뭔가 꼬리표 같은 게 따라 붙잖아요. 그런 시선들이 느껴졌어요. '아 쟤가 걔구나.' 나를 나로 안 보고 다른 무언가와 연관 지어서 보는, 측은하게 보는 시선, 이런 게 막 겹친 것들. 그게 싫었어요. 그 시선을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온몸으로 느꼈죠.
또 저는 딸 셋인 집안에서 자랐는데 '여자니까'라고 해서 강요받거나 '여자라서' 못하게 하는 것들이 없었어요. 오히려 점점 나이를 먹고 크면 클수록 접하는 사회의 면들이 넓어지니까 여자라는 이유로 계속 꼬리표가 붙는 거예요. 여자라서 능력을 의심 받을 때도 생기고. 정말 그건 저한테 충격적인 순간이었어요. 제가 진보적인 신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로 '쟤는 진보신학이나 알지 성경을 뭘 알겠냐'는 분도 있었죠. 지금 혐오적인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저에 대한 태도랑 비슷해요. 그렇게 꼬리표를 다는 게 꽤 많더라고요."
- 소수가 되고 소외를 받는 경험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삶을 이해하셨군요.
" 반면에 제가 결혼을 하고 또 자녀를 출산하고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면제되는 것도 있어요. 성소수자 인권 옹호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비혼으로 알고 계셨던 분들도 꽤 많더라고요. 제가 가족을 드러내고 이런 것도 아니고, 저희 딸들이 이 교회를 출석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집이랑 멀기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교인들 중에서도 새로 오시는 분들은 깜짝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그렇게 어떤 꼬리표가 붙거나 그걸 피하는 경험이 교차하면서 어떤 삶의 문제든 다 내가 겪을 수 있다는 생각들을 했어요."
- 인권단체 활동가로서는 앨라이가 저에게 정치적인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데요,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많이 모우고 세상을 바꾼다는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종교인으로서 임보라 목사님께는 앨라이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권재단 사람에서 연속 강의를 하고 강사로 참여했었던 사람들의 원고를 묶어서 '곁에 서다'라고 하는 책을 낸 적이 있어요. 저는 앨라이라는 게 곁에 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곁에 서줄 수 있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기독교에서도 이웃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그런 거거든요. 예를 들어 이웃이 진짜 못 먹거나 추위에 떨고 있거나 그러면 배불려주고 따뜻하게 옷을 입혀주라고 하죠. 또 누군가가 근거 없는 공격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는 곁에 서서 방어도 해주고 같이 싸워주기도 하고요. 그런 이야기들이 성경에 되게 많아요. 앨라이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웃 사랑은 크게 다른 게 아니에요.
다만 그런 건 있어요. 더 정의롭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길에 서있는 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행한다면 초대형 교회가 되고도 남아야 될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되게 작은 교회들이죠. 800억 원씩 비자금을 쌓아두는 게 아니라 다들 8만 원 쓰는 것도 벌벌 떠는.
저는 물론 앨라이는 점점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소수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하죠. '모두가 넓은 길을 가려고 하지 결코 좁은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더 쉬운 길을 가려고 하지 더 어려운 길 가려고 하지 않는다'라고들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셔요. 비록 매우 고통스러워도. 예수님 자신도 굉장한 모욕을 당하고 결국은 죽임을 당했는데도 좁은 길을 묵묵하게 가는 것. 그게 예수님이 보여준 길인 거죠.
그렇다면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도 열심히 애는 쓰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수로 보일 수밖에 없는 자리로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무지개 예수며 섬돌향린 교회의 몸집과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한다. 그게 또 각자의 앨라이에게 주어진 몫이 아닐까 싶어요. 앨라이들이 많아지도록 하되 본연의 외로운 길을 가는 것을 감내한다."
"우리는 우리 몫을... 외로워도 간다"
- 성소수자와 함께 하기로 결정하고 활동을 시작하실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제가 부목사로 있을 때도 담임 목사님이 저의 활동을 막거나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라든가 그러신 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어떤 이슈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뭘 논쟁을 하거나 이럴 수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제가 쭉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제재를 받은 적은 없어요.
다만 섬돌향린교회가 2013년에 시작됐는데, 그해 4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견을 냈던 적이 있어요. 정말 짧게 나갔는데요. 그날 인터뷰하고 와서 메일을 딱 여는 순간 난리가 나있었던 거예요. 교회 홈페이지도 그렇고.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밖에 안 되는 교회가 완전히 집중포화를 당한 거예요."
- 정말 큰일이었을 텐데 신도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사실 교회에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어요. 그분들이 저에게 '어디 가서 발언 좀 하지 말라'거나 '목사님이 어디 공중파 같은 거 안 탔으면 좋겠다' 이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시고, '이러다 목사님 어디 가서 쥐어 터지고 오겠습니다'라며 걱정하시더라고요.
또 교회 대표로 제가 등록이 되어 있었는데, 4대 보험에서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 같은 걸 제가 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 분들이 걱정하다가 상해보험은 부어야 한다고, 큰일 나면 어떡하느냐고 그러셔서. 물론 감사하게도 제가 어디 가서 쥐어터지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때 상해보험을 떠올리는 교인 분들을 보면서 내가 어디 가서 맞는 한이 있어도 비겁하게 숨거나 그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굉장히 좋은 동료들을 주변에 두신 것 같아요, 그렇다면 혹시 성소수자 앨라이 종교인으로 활동하시면서 어려움이 있었던 순간은 있으셨나요?
"외압이라면 외압이랄까. 밖에서 끊임없이 편견을 가지고 달려드는 사람들의 공격이 힘들었을 수 있겠네요. 작년 같은 경우도 그랬죠. 그 때 세 개의 교단인가가 벌떼처럼 일어나 (저를) 이단 지정을 했는데, 충격은 충격이었던 거 같아요. 다른 교단이 이단이라고 해봐야 영향은 없어요.
그런데 피해의식이 생기는 거예요. 모르는 교회만 보면 누군가 저기서 튀어나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고. 하다못해 동네에서 운전을 하다가 예를 들어 교회 주차장에 차를 대야하거나 할 때 '그냥 돌아가고 말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가장 힘든 순간은 누군가가 죽었을 때인 것 같아요. 같이 공동체에서 추모할 수 있는 분도 계시지만 커뮤니티 활동을 안 하는 분의 죽음을 상담이나 다른 경로로 알게 됐는데 집단적인 애도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 사연을 숨겨야 할 때. 어떤 경우 그분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갈등이 심했고 그 속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면 슬픔도 드러내기가 어렵죠."
- 그럴 때 다시 좀 힘을 얻는 방법이나 그런 것들이 혹시 있으실까요?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에 갔을 때, 저도 막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경험을 했죠. 사람들의 살기가 등등한 눈초리를 너무 많이 받았고. 이 사람들 이러다 일내는 거 아닌 가,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또 혐오집단 쪽에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게 정말 트라우마로 남더라고요.
그런데 이후에 인천에서 혐오범죄 규탄 집회를 열었잖아요. 사람들이 모이고 그러면 기운이 느껴지고 같은 것들을 바라는 마음들이 모이고, 같이 퍼레이드를 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 것들이 엄청난 힐링이에요. 소진된 상태에서 확 올라가는 느낌. 차가 주유하면 바늘이 움직이는 것처럼 차오르는 그런 느낌. 그런 것들을 또 느끼게 되죠. 아이다호 데이 때도 행사 끝나고 레이디 가가의 <본 디스 웨이> 틀어놓고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막 뛰고 했었던 것들이 좋았어요. 이 사회에서 너무나 이상한 존재, 무슨 악의 축처럼 매도되는 집단이 스스로를 막 풀어 헤치면서 신나게 몸짓으로 혐오에 맞서는 모습에서 엄청난 희열을 느끼게 되는 거 같아요."
- 격렬한 긴장과 불안의 순간에 결의를 다지셨다는 게 인상 깊습니다.
"그 현장이 그렇게 만드는 거 같아요. 그저께인가도 후배 목사분이 '선배로서 앞장을 서주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앞장을 서려고 한 게 아니라 지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내 발걸음대로 온 건데 오다보니까 '사람들이 없네, 왜지? 뭐지? 어디 갔지?' 이렇게 된 거죠. 그러나 지나고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 있더라고요. 이번에 이단 지정됐을 때엔 '나는 임보라다'란 캠페인하는 선배들이 계셨는데 너무 민망하고 죄송했죠.
많은 분들이 아직 공개 지지는 어렵지만, 너무 마음 아파하시는 걸 알아요. 메시지를 주세요. '너를 지지하고, 교회들이 변해야 한다는 것 알고 있다'라고. 혐오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이 쭉 이렇게 가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저는 반대라고 해요. 혐오가 강하질수록 앨라이가 더 많아질 거니까요. 저는 정말 그걸 체험하고 체감한 사람이거든요."
-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특히 종교인 앨라이가 절실한 시점이라 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선뜻 용기를 못 내시는 분들도 많은 게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막막하니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분도 많고요. 그런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혹시 있으실까요?
"이런 질문들을 많이 받는 거 같아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요?' 근데 저마다 상황을 들어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다른데, '앨라이라고 말하고 다니세요' 이럴 순 없잖아요. 사실 많이 하는 얘기는 '이렇게 좋은 책들이 이미 있는데, 이런 것들을 일단 좀 접해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라고 해요. 그리고 퀴어문화축제 같은 곳도 가보셔라. 가서 무엇이 진짜 거기서 나온 목소리들인지 좀 보셔라.
많은 분들이 그러세요. 혐오 세력들이 도배하듯이 올리니까 동영상이며 자료들이 혐오에 근거를 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고. 당연히 그렇겠죠. 기독교 케이블 채널마저도 그러는데, 물량으로는 게임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성소수자 단체도 있고 올바른 정보를 담은 많은 기사들이 나오니까 그런 소스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일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 보면 어떠냐고 말씀드려요.
조금 더 한 걸음 더 나가면 '우리가 대화를 위해서 어디를 방문해보면 좋을까, 누구의 말을 들어보면 좋을까' 이런 이야기도 하게 되요. 시작하면 확실히 달라진다고들 해요. 교회에서도요."
- 보통은 내가 이야기를 해도 상대방이 달라지지 않으면 어떨까 두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만나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달라져요. 정말 달라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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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교단이 '이단 지정'한 목사, "차라리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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