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사건 당시 법원의 판결을 듣고 있는 피의자들. 1958년 7월 31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둔 조봉암은, 52년만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동춘
헌정사상 첫 사법거래, 사법농단이었다.
이승만의 폭거에 사법부와 검찰이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한 것이다. 이를 지켜 본 장일순은 무엇보다 정치개혁이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쳤다.
때마침 진보계열의 인사들이 1960년 6월 17일 혁신정당의 재건을 목표로 구 진보당ㆍ노동당ㆍ민주혁신당 등이 중심이 되어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서상일과 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하고 창당작업에 착수하여 1960년 11월 24일 창당에 이르렀다. 4월혁명을 주도한 학생 중에 참여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장일순도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사회대중당은 창당을 준비하면서 이 해 7월 29일 실시한 민ㆍ참의원 선거에 참여했으나 재야정당의 난립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장일순도 원주에서 입후보했다가 낙선하였다. 돈도 조직도 그렇다고 선전기능도 없는 혁신정당의 신진이 선거에서 당선되기는 쉽지 않았다. 이승만 치하에서 혁신계는 좌경으로 매도되고 그런 인식은 혁명 후에도 쉽게 국민의 뇌리에서 불식되지 않았다. 또한 4월혁명의 '핏값'은 민주당이 독차지하는 듯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