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을. 현미에게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unsplash
어느 여름날, 창 너머 뉘엿뉘엿 지는 해가 구름과 함께 만든 아름다운 노을.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볼 그 풍경은 현미에게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15년 전 그날, 위탁 가정의 '아저씨'는 현미를 강간했다. 현미는 세 살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엄마도 몰랐다. 한 달에 한두 번 찾아왔지만, 대부분 몇 시간 만에 헤어졌다. 그렇게 현미는 이 부부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15년 전 일이었다.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현미의 기억마저 명확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그때가 언제쯤인지 기억나니? 계절이라든지."
"아마 7~8월 정도일 것 같아요."
"시간은? 시간도 기억나니?"
"저녁이었어요. 한 6~7시 정도일 거예요."
순간 현미의 진술을 의심했다. 15년 전, 겨우 세 살 때 기억을 이처럼 또렷이 기억할 수 있을까? 성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매우 중요하다. 피해자 진술 외에 별다른 증거가 없는 사건의 경우 더욱더 그렇다.
그 중요성 때문에 피해자는 간혹 범행 상황을 꾸며내기도 한다. 이럴 경우 오히려 진술에 모순이 생길 수 있다. 이때 가해자는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조그마한 모순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피해자의 진술 전체를 거짓으로 몰아간다. 그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면 사건은 그대로 끝나버린다.
하지만 이어진 현미의 말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아저씨가 반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그리고 상당히 더웠던 것 같아요. 초여름은 아니에요. 저를 앉은뱅이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짓을 했는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더니 창밖에 노을이 보였어요. 초저녁 같았어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가슴 속에 담아두고 끙끙 앓아온 기억이 지워질 리 없었다. 현미의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했던 내가 미안했다. 현미는 그날의 기억을, 그날의 창밖 풍경을 15년 동안 온전히 몸에 새겨두고 있었다.
동시에 나의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기소 가능성이 없다!' 가해자는 당연히 범행을 부인할 것이다. 현미의 진술이 아무리 일관되고 구체적이라 해도 피해자 진술만으로 15년 전 사건을 기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5년 전 사건, 하늘이 도운 줄 알았다
고소야 어려울 것 없지만, 결국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다면... 현미의 상처는 더 커질지 모른다. 그 짐은 온전히 현미가 짊어져야 한다. 가슴 아프지만, 결정 역시 현미가 해야 했다. 어쭙잖게 내가 나설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현미야. 내가 생각할 때 고소를 해도 그 아저씨 처벌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미 20년 가까이 지난 사건이고, 증거도 찾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 아저씨를 찾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 만약 그 아저씨를 찾았는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네가 너무 힘들지 않겠니?"
현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인했다.
"변호사님. 고소라도 해보고 싶어요. 중학교 때 진짜 절친이 있었는데, 가끔 그 아이네 집에 놀러 가서 자고는 했어요. 그러다 딱 한 번 그 아이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엄마한테도요. 정말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요. 이렇게 어렵게 꺼내놓았고 변호사님까지 찾아왔는데, 고소라도 해보고 싶어요."
현미는 곧 눈물을 흘릴 것 같았지만, 나는 순간 웃었다. 기쁨의 웃음이었다. 현미가 생각보다 강인한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내가 기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미가 말한 중학교 친구였다.
현미는 다행히도 딱 한 명, 중학교 시절 단짝에게 성폭행 피해를 털어놨다. 그렇다면 그 친구의 진술 역시 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현미의 진술보다는 힘이 떨어질 수 있지만,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고소장을 작성해 현미와 함께 경찰을 찾았다. 경찰의 도움이 간절한 사건이었다. 가해자를 찾아내는 것부터 난관이 예상됐고, 현미의 옛 친구도 찾아야 했다. 다행히 경찰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현미의 기억에 따라 주소지를 특정, 당시 거주자를 찾을 수 있었다. 중학교 친구는 학교 자료로 비교적 수월하게 찾았다. 다행히 이 친구는 현미가 털어놓은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기꺼이 진술서를 써줬다. 필요하다면 법원에 출석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가해자가 잡아떼면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경찰에게 거짓말 탐지기라도 사용해 보자고 했다. 그 결과가 핵심 증거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가해자를 압박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일이 너무나 쉽게 풀렸다. 가해자는 현미와 그 친구의 진술을 알려주자 순순히 자백했다. 아마 시효가 지났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피해자인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시효가 중단된다. 아직 시간이 충분했다.
시효가 남았음을 알려주고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자 가해자는 이내 말을 바꿨다. 몸을 더듬은 적은 있지만 강간을 하진 않았다고 했다. 이미 꺼내놓은 진술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사건이라도 축소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가해자는 끝까지 강간만을 부인했지만 경찰은 강간혐의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