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김진수는 잘 생긴 외모에 항상 책을 옆에 끼고 다녀 동료들에게 인기도 높았다고 한다.
추모단체연대회의
집에서 비교적 가깝고 회사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한영섬유에서 김진수는 첫 월급으로 1만 2000원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1968년 당시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임금은 9120원이었다. 김진수에게는 1969년에 둘째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더 커진 책임감과 아울러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성과 연애를 하면서 결혼까지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런 김진수였지만, 노동현장에서 끊임없이 부딪치는 관리자들의 폭언과 횡포, 일요일도 쉬지 못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한영섬유는 근무시간에 외출은커녕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회사였다. 그러다 보니 1970년 12월 김용욱 등이 주도하여 한영섬유 노조를 결성할 때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안양 패거리'들을 대표하여 사전 준비모임에서부터 기꺼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멈추지 않던 '노조 파괴'... 꽃다운 나이에 지다
노조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회사는 노조결성을 막지는 못했지만,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움직였다. 곧바로 직장 폐쇄 방침을 발표하면서 노동자들의 사직을 유도하는 한편, 다음 해 1월 4일에는 김용욱, 고석민, 이장원, 장은수 등 노조 간부를 강제 해고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벌인다.
김진수도 회사의 방침에 속아 다른 동료 200여 명과 함께 12월 31일자로 회사를 그만두었다가 노조의 진정으로 근로감독관이 "헌법에 보장된 노조활동을 인정하라"고 지시하면서 다음해 1월 10일 재입사 형식으로 다시 한영섬유에 들어온다.
그럼에도 회사의 노조 파괴 책동은 멈추지 않는다. 중앙노동위원회가 김용욱 등 해고자 4명에 대한 구제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회사는 불복하여 곧바로 재심을 청구하면서 이번에는 열성노조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맞서 노동조합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며 쟁의발생 신고를 하지만, 회사의 탄압은 그칠 기미도 없었다.
이때 회사의 노조 와해 책동의 행동대 역할을 한 인물이 최홍인, 홍진기, 정진헌 등 3인이었다. 이들 3인은 노조가 만들어지기 직전인 12월에 다른 폭력사건으로 회사에서 해직된 인물이었는데, 노조와해 행동대 역할을 시킬 목적으로 1월 초에 재입사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공장장 유해풍의 지시를 받아 조합원들을 협박하여 "노조 때문에 휴업을 하게 되었으니 다시 일을 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진술서와 노조 탈퇴서를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김윤기, 함성길 등 노조 핵심멤버에 접근하여 일부러 시비를 붙어 폭력을 유도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회사는 심지어 노조파괴를 위해 진오와 창수라는 이름의 대방동 깡패를 채용하기도 했다.
유해풍은 이들 3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신변보장 각서(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즈)까지 써주면서 독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 서
성 명 유 해 풍
상기 본인은 홍진기, 최홍인의 진술서에 대하여 차후에 신변에 어떠한 지장을 가져올 시에는 힘이 최대한 있는 데까지 보장의 책임을 질 것을 각서합니다.
1971. 1. 5
유 해 풍"
문제의 1971년 3월 18일, 오후 작업을 마친 직후에 이미 회사 근처 가게에서 소주, 포도주, 막걸리 등을 마셔 술에 취한 상태의 홍진기 최홍인 정진헌 등 3인은 노조 일에 적극적이던 김진수에게 접근해 노조탈퇴를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조 탈퇴를 거부하는 김진수의 머리를 정진헌이 드라이버로 찔러 2.5cm가 머리가 박히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김진수는 직장동료에 업혀 급히 대림성심병원으로 이송되지만,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회사 측이 '공원끼리 다투다가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하여 의사도 제때 손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여 2차에 걸쳐 뇌수술을 하지만, 이미 뇌 전체가 오염된 이후였다. 결국 김진수는 두 달간 사경을 헤매다 5월 16일에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