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무위당사람들
장일순은 궁핍한 시대에 여유있는 가정에서, 그것도 비범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한다. 어머니도 보통 여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없이 자애롭고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품성이었다.
장일순ㆍ화순 형제가 학교에 갔다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남은 밥을 차려주었는데, 찬밥이었다. 그러나 손님에게는, 그것이 장일순네의 논밭을 부쳐먹는 소작인이더라도 꼭 새로 밥을 지어 드렸다. 그 차이에 하루는 장화순이 심통이 났다.
"어머니, 왜 저분들에게는 더운밥을 주고, 저희에게는 찬밥을 주시는 거에요?"
어머니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툴툴거리지 말고 그냥 먹거라."
그 까닭은 어머니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집안의 생활 속에서 절로 터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하루는 거지가 동냥을 얻으러 왔다. 장화순이 돈 주는 일을 맡게 됐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가 더러워보여 돈을 던져주었다. 그 모습을 아버지가 보았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두 손으로 공손히 드려야 했다. (주석 1)
어린시절 장일순의 별명이 '애어른'이었다.
진중하면서 아는 것도 많고, 친구들에게 배려심이 깊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매우 의젓하고 남을 잘 도왔다고 한다. 특히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형제 남매들 사이에 우애가 각별하였다.
장일순의 어린 시절은 할아버지ㆍ할머니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엄격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동정하는 가풍이었다.
할아버지가 앉는 곳 바로 곁에는 문이 있고, 거기 밖이 내다보이는 유리가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곳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밥을 얻으러 온 사람이 있으면 윗목에 앉아 밥을 먹는 며느리를 불렀다.
"얘, 어멈아, 손님 오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바로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 동냥 그릇을 들고 온 이에게는 밥과 찬을 담아주었고, 빈손으로 온 이에게는 윗방에 따로 상을 차려 대접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일까?
어른이 된 뒤로도 장일순ㆍ화순 형제는 집에 손님이 오면 밥부터 먼저 챙겼다. 결코 끼니를 거르게 하는 일이 없었다.
(주석 2)
장일순은 원주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의 친구이고 독립운동가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차강은 이 집안의 식객으로 한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장일순의 일가를 이룬 서예와 그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