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평오고택 안채의 굴목 정지와 별도로, 한 사람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은 공간에 불 때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육지의 ‘아랫정지’와 비슷하나 작고 부뚜막이 없이 군불아궁이만 있는 점이 다르다.
김정봉
성읍마을 굴뚝
밥 짓는 곳과 군불아궁이에 굴뚝은 없다. 이유가 뭘까? 대개 추운 북쪽지방 굴뚝은 높고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갈수록 낮아지며 제주도에 와서는 사라져 민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제주의 인문, 자연환경과 관련 있다.
자연환경으로는 따뜻하고 바람이 많은 날씨와 땔감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인문환경으로는 애당초 구들과 굴뚝의 보급이 늦어진 데다 취사와 난방이 분리된 채, 화덕과 부섭을 사용하는 제주의 독특한 난방문화가 폭넓게 자리 잡으면서 구들과 굴뚝의 북방문화 유입을 늦추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주는 바람이 많아 바람에 쓰러지고 열을 쉽게 빼앗기는 높은 굴뚝은 생각조차 안 했을 듯싶다. 그렇다고 굴뚝을 낮게 만들면 세찬 바람에 연기가 역류하기 십상이어서 낮게 만들지도 못했다.
말똥, 소똥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제주는 늘 땔감이 부족했다. 물 부족, 땔감 부족에 시달려온 제주 사람들은 땅으로 꺼지는 물 한 방울도 아까워 '촘항'에 받아쓰고, 하늘로 솟는 한 줌 연기가 아까워 구들 밑 고래(연기가 통해 나가는 길)에 가두려 했다. 연기가 쉬 빠지게 하기보다는 굴뚝을 없애 불김이 고래에 오래 머물게 한 것이다.
아궁이 옆에 늘 널돌을 준비해 놓고 불을 지핀 다음 땔감이 오래 타도록 널돌로 아궁이를 막은 것을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물론 널돌은 바람으로부터 화재를 막는 역할도 하였다.
기술과 문화적인 이유도 있다. 제주에 구들이 들어온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처음에는 객사나 동헌에 먼저 설치되고 차츰 민가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가의 구들과 굴뚝 기술은 그만큼 부족했다. 여기에 제주의 독특한 난방, 취사문화가 구들과 굴뚝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더디게 한 건 아닌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