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를 둘러싼 U자 라인.
김종성
조선 영조 때인 1752년 세워진 미얀마 꼰바웅 왕조는 조선 정조 때인 1790년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체결했다. 미얀마가 청나라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1993년 발행돼 중국 대학들에서 역사 교재로 사용된 장웨이화(张维华)의 <중국 고대 대외관계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고대'가 '고대·중세·근대'의 그 '고대'가 아니라 '과거'나 '옛날'이란 의미로 쓰였다.
"1769년, 청나라 정부는 마침내 대학사 부항(傅恒)을 파견해 미얀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이끌도록 했다. 부항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눠 함께 전진시키며 미얀마 진입을 지휘했다. 미얀마 왕인 신퓨신은 두려워서 강화 협상을 요청했다. 그때 청나라 군대도 풍토병에 걸려 더 이상 싸우기 힘들었다."
이때의 강화 협상이 발효된 것은 1790년이다. 1790년부터 미얀마 군주는 청나라가 책봉하는 '미얀마 국왕'의 지위를 갖게 됐다. 이렇게 생긴 관계는 95년 만인 1885년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깨지고 말았다.
중국과 U자 라인의 순망치한 관계에 대한 서양의 판단은 적중했다. 티베트·미얀마·베트남·타이완·오키나와가 서양 혹은 일본 수중에 넘어간 뒤인 1910년 조선이 멸망함으로써, 청나라와 U자 라인의 동맹관계는 최종적으로 소멸됐다. 그러자 2년 뒤에 청나라는 신해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수치의 균형외교를 바라보는 시각
U자 라인에 대한 공략으로 단절된 미얀마와 중국의 관계는, 미얀마 독립 23년 뒤인 1971년 회복됐다. 네윈 장군이 미얀마를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1885년까지 있었던 중국과 미얀마의 수직적 상하관계가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서방세계의 눈에는 미얀마가 마치 U자 라인으로 복귀된 것처럼 비칠 만도 했다.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가세하지 않겠다는 비동맹노선을 철저히 이행해온 미얀마가 중국과 밀착하기 시작했으니, 미국 등 서방세계한테는 그렇게 보일만도 했다. 그래서 서방세계는 미얀마 군부정권을 압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얀마가 서방세계의 경제제재를 받는 동안에 중국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미얀마 상품을 수입하고 군사무기를 수출했다. 이런 속에서 미얀마는 중국의 인도양 진출에 교두보가 되어주었다. 그간 미국 등 서방세계가 미얀마를 압박하고 아웅산 수치를 후원한 것은 인권문제 때문인 측면도 있었지만, 미얀마 군부의 반미노선과 친중국 노선 때문인 측면도 컸다.
미국은 박정희 군사독재를 후원한 나라다. 전근대적인 일본의 천황제도 지켜준 나라다. 미국이 우선시하는 것이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국의 국익이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미국이 미얀마 군부를 싫어했던 핵심적 이유는 그들이 미국의 국익 증진에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웅산 수치를 열렬히 후원했던 미국 등 서방세계가 근래 들어 태도를 바꾼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로힝야족의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인 측면도 있지만, 수치의 외교노선에 대한 우려 때문인 측면도 크다. 집권한 뒤에 그가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노선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다 지켜봤듯이 수치는 서방세계의 지원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 됐다. 서방세계의 전폭적 후원이 있었기에, 군부 정권의 탄압을 이겨내고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미얀마 민주화세력과 그 자신의 노력이 가장 컸겠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아웅산 수치도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서방세계 입장에서는, 수치의 집권과 더불어 미얀마 외교노선이 바뀌리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미얀마가 더 이상 중국을 돕는 일이 없을 거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나타났다. 수치가 군부정권의 외교노선을 계승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달라진 점은 있다. 수치는 미얀마와 서방세계의 관계도 강화했다. 그래서 수치 입장에서는 "나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추구하고 있다"고 서방세계에 외칠 만도 하다. 하지만, 수치에게 기대감을 크게 가졌던 서방세계로서는 이런 균형외교도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다.
균형외교란 표현은 수치와 서방세계의 관계를 최대한 좋게 평가했을 때나 가능한 표현이다. 엄밀히 따지면, 수치의 외교노선은 중국 우선주의다. 이 점은 2016년 대선 직후에 보여준 일련의 행보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은 아웅산 수치한테는 적이었다. 미얀마 군부정권을 도운 나라다. 중국은 미얀마 문제에서만큼은 아웅산 수치와 서방세계의 공동의 적이었다. 그런데 대선 승리 직후, 수치는 '어제의 적'과 과감하게 손을 잡았다.
2016년 3월 31일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외교부 장관이 된 그는, 불과 닷새 뒤인 4월 5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을 초청했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회담을 가질 첫 번째 카운트파트로 중국 외교부장을 선택한 것이다. 뒤이어 8월에는 직접 베이징으로 날아가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를 만났다. 중국은 그를 총리급으로 한껏 예우했다. 이렇게 중국을 먼저 방문한 뒤인 그 해 9월 미국을 방문했다.
군부정권의 중국 우선주의 외교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서방세계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안문석 전북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 '아웅산 수치의 균형외교'는 이렇게 말한다. <인물과 사상> 2016년 11월호에 실린 글이다.
"중국은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미얀마 교역의 제1파트너이고, 미얀마가 유치한 외자 총액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 장래 미얀마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치는 중국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 수치는 시진핑 주석의 세계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에도 협조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육로와 해로를 잇는 신개념 실크로드(비단길)를 만들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만들겠다는 웅대한 전략이다. 수치는 중국이 미얀마를 거쳐 인도와 인도양 쪽으로 일대일로 라인을 확장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서방 세계가 지금 수치를 압박하는 것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같은 수치의 외교노선에 실망했기 때문인 측면도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수치를 열렬히 후원했던 그들은 수치의 실용주의 외교를 보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이 한 단계 더 심화되다 보니, 수치에 대한 서방세계의 압박에 명분과 힘이 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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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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