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원 정문에서 ‘말리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빨간 벽돌로 만든 계단 59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한 해리 홀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쉰 아홉 개로 이어져 있다.
정현주
복지원 정문에서 '말리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빨간 벽돌 계단이 단풍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자아낸다. 안내해 주신 분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계단은 59세를 일기로 사망한 해리 홀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계단이었다. 계단의 숫자가 59개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말리의 집은 매우 작고 소박했다. 아버지 해리가 지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말리는 일생을 함께한 동료이자 친구인 조병국 박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병국 박사는 홀트 부속병원의 의사로, 평생 홀트 복지원에서 고아와 장애인들을 돌봤다.
고민할 틈 없이 뛰어들 수밖에 없던 절박했던 현실
1956년 말리가 한국에 왔을 당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말리와 조병국 박사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60년 세월은 한 순간에 무색해졌다.
긴박했던 현실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다. 시설마다 고아들은 넘쳐났고 의사와 간호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매일 아동들이 밀려들어 왔고, 매일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나갔다. 2018년의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해외 입양'의 의미는 '아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준다'라기 보다는 '생명을 구한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였다.
인터뷰 전에 '평범한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먼 이국땅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한 결정'에 관해 묻고 싶었으나, 나는 이 질문을 끝내 하지 못했다.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리의 이야기 속에는 도움이 필요한 한국의 아동들, 장애인, 어려운 이웃들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도와야 하는 손길들이 그의 삶에 펼쳐졌다.
젊은 말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학업과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홀트에만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 컴패션'(Compassion Korea,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 한국지부)이나 한국 정부와 연계해 전국의 보육원과 무의촌을 돌며 봉사활동도 했다.
"아마 1970년쯤이었을 거예요. 1968년 유례없는 흉년으로 한반도 남쪽에 고아들이 많이 생겼을 무렵이었죠. 컴패션 활동을 위해 광주에 있는 보육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원장 선생님은 '독감'이라고 하셨죠. 제가 아픈 아이 몇 명을 병원에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진단을 받아보니 사망률이 높은 고열의 전염병 '장티푸스'였어요. 다급히 격리치료를 했습니다."
모든 아동은 가정에서 자랄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