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무위당사람들
그런데 한 분을 놓쳤다. '놓쳤다'는 표현은 '나중에' 찾아뵙기로 미루다가 그 분이 뜻밖에, 너무 일찍 하세함으로써 이승에서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는 뜻이다. 그 '죄책감'에서 이 평전을 쓰게 되었다고 할까.
유신ㆍ5공시대에 민주인사들의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이 분의 함자가 거론되었다. 각종 시위의 배후인물인 것 같았고, 주모자인 듯도 하였다. 종합하면 독재세력에 쫓기는 자들의 피신처 또는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구원자 그리고 당시만 해도 생소한 생태주의자, 생명운동가였다.
선생은 엄혹한 시대를 절망하면서도 '길이 없는 길'을 찾으면서 후학들에게 이를 제시하고, 양심수들을 위로하고, 청년들에게 미래의 눈을 틔운 구도자 또는 경세가의 모습으로 존재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서기를 꺼리고, 지도자연하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중층적인 모순이 겹겹이 쌓인 채 독재자와 추종자들의 언설이 민중의 이성을 가리던 시절, 선생은 어디에도(무엇에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시대를 내다보는 심원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민중(족)의 앞길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