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의 협약식이 열렸다.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 김지형 조정위원회 위원장, 반올림 황상기 대표가 협약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권우성
삼성, 조정위원회 최종 중재안 조건 없이 수용
이 같은 사과는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원회)가 지난 1일 권고한 최종 중재안에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이 그간 두 단체를 중재해온 조정위원회의 최종 중재안에 서명함으로써,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11년 만에 매듭짓게 됐다.
삼성전자는 최종 중재안을 조건없이 수용, 이행한다고 밝혔다. 최종 중재안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재발방지 및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 원을 출연한다. 이 기금을 기탁받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전자산업 등 안전보건 예방을 위한 연구개발 및 전문서비스 개발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사용할 예정이다.
지원보상 대상은 삼성전자 최초 반도체 양산라인인 기흥사업장 제1라인이 준공된 지난 1984년 5월 17일 이후 반도체나 LCD 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삼성전자 현직자·퇴직자 전원과 사내협력 업체 현직자 및 퇴직자 전원이다. 지원보상 기간은 1984년 5월 17일부터 2028년 10월 31일까지로 했다. 그 이후는 10년 후 별도로 정하기로 했다.
지원보상 범위는 반도체나 LCD 작업환경과의 인과관계에 있어서 논란이 된 암 중 갑상선암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암이다.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 다발성골수종, 폐암 등 16종의 암이 포함됐다. 희귀암 중에서 환경성 질환은 모두 포함하며, 다발성 경화증, 쇼그렌증후군, 전신경화증, 근위축성측삭경화증 등 환경적 요인에 의해 발병한다고 알려진 희귀질환 전체도 포함했다. 이외에도 유산 등 생식질환과 선천성 기형․소아암 등 자녀에게 유전되는 질환 등도 대상에 들어간다.
지원 보상액은 백혈병이 최대 1억5000만 원이며, 비호킨림프종, 뇌종양, 다발성골수종 등은 1억3500만 원이다. 사산과 유산은 각각 1회당 300만 원과 100만 원으로 최대 3회까지 지원된다.
조정위는 "이번 중재의 기조는 반도체 및 LCD 작업환경과 질병과의 인과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전제로 했다"라며 "피해자 구제를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개인별 보상액은 낮추되, 피해 가능성이 있는 자를 최대한 포함하기 위해 보상범위를 대폭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보상수준은 산재보다 낮다고 했다. 피해 보상업무는 법무법인 지평이 위탁받아 이행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오는 30일까지 회사 홈페이지에도 사과문과 지원보상 안내문을 게재하고 지원 보상을 받은 반올림 피해자에게는 개별적으로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전달할 계획이다.
반올림 "삼성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다"
"제 딸 유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쁘다. 하지만 유미와 제 가족이 겪었던 아픔은 잊을 수 없다. 너무 많은 분들이 이런 아픔을 갖고 있어서다."
삼성전자 대표의 사과에 대해 반올림 피해자 대표이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인 황상기씨는 말했다.
황씨는 오늘의 사과를 삼성전자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황씨는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는 솔직히 직업병 피해가족들에게 충분하지는 않다"라며 "지난 11년간 반올림 활동하면서 수없이 속고 모욕당했던 일이나 직업병 고통, 사랑하는 가족 잃은 아픔을 생각하면 어떤 사과도 충분하지 않지만 받아들이겠다"라고 밝혔다.
황씨는 "이번 보상안이 대상을 대폭 넓혀서 반올림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도 포함돼 다행"이라면서도 "사외협력업체 등 보상에 포함되지 못한 분들이 있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아직 남은 숙제도 있다고 했다. 황씨는 "직업병 피해는 삼성전자 반도체·LCD 부분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삼성전기, 삼성 SDS, 삼성 SDI 등 다른 계열사에서도 유해물질 사용하다가 병든 노동자들이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피해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삼성은 이 모든 직업병 노동자를 위한 폭넓은 보상을 마련하길 바란다"라고 했다.
산업안전보건법도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황씨는 "산업재해 보상받기가 어렵지 않았다면 노동자와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직업병 보상도 중요하지만 예방도 중요하다. 노동자가 무슨 화학물질을 쓰는지 알 수 있게 노동자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알 권리, 참여할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했다.
삼성전자가 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한 500억 원에 대해 황씨는 "노동자들이 땀 흘려 일해서 만든 돈이라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라며 "이 소중한 기금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 안고 전자산업, 노동자 안전과 건강을 위해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와 국회를 향해서도 "안전보건에 관한 사업주의 책임을 엄격히 묻는 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한편 대기업들에게도 "솔선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달라"라고 요구했다.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6년 동안 일한 뒤에 뇌종양을 얻은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는 <오마이뉴스>에 "오늘 한숨도 못 잤다"라면서도 "기쁘다"라고 했다. 김씨는 "삼성이 왜 진작 이런 사과를 하지 못했는지 아쉽다"라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삼성이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