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선생은 소설 형식으로 엮은 허형식 평전 <허형식 장군>이라는 책을 냈다. 박도 선생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허형식은 여전히 중국인으로 알려져 왔을 것이다. ⓒ 정운현
이자영
정 교수는 "육사 이원록은 모친 허길이 허형의 딸"이라며 "그를 저항 시인으로만 생각하는데 너무 편협한 역사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수감번호가 264번이라 이육사라 불리는 이원록은 저항 시인으로 '광야' '절정' 같은 저항시를 남겼을 뿐 아니라 17차례나 옥고를 치르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에 연루되는 등 의열 투쟁에도 앞장섰다.
그는 "안중근의 막내 여동생으로 알려진 안성녀의 묘가 2005년 발견돼 부산 <국제신문>에 의해 알려졌다"며 "묘비명이 안성녀가 아닌 세례명인 안루시아로 되어 있는데 솔직히 사람들이 어떻게 이 묘가 안성녀 묘인지 알겠냐"고 반문했다. 안성녀는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군복을 제작하는 등 항일 투쟁을 함께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추가로 기록이 더 나오지 않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안중근은 동학농민전쟁 때 부친인 안태훈과 정부군 편에 서서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참여해요. 백범 김구는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사령관 격이었어요. 백범 김구의 그때 이름이 김창수입니다. 김창수가 이끄는 부대가 안중근 부대와 싸워서 져요.
김창수의 인품을 전해 들었던 안태훈이 김구를 살리기 위해 절에 피해 있던 김창수와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했어요. 나중에는 안태훈이 김창수를 집으로 오게 하는데 그때 안중근과 김창수가 처음 만납니다. 나중에 안중근의 조카이자 안정근의 딸인 안미생이 김구의 며느리가 됩니다.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돼요."
정 교수는 "의병장 왕산 허위 가문도 석주 이상룡 선생 집안과 겹사돈을 맺었다"며 5대 항일운동 가문의 헌신적인 투쟁 뒤에 가려진 삶을 전했다.
이어 "안중근의 왼손 약지가 해방 후까지 실존해 있었다"며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 선생의 며느리가 그 한 마디를 둘둘 말아서 허리춤에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잊어버려 찾을 수 없게 된 단지 하나가 있었다면, 효창원에 있는 안중근의 묘가 가묘가 아니게 된다"며 아쉬워했다.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 가문을 소개하던 정 교수는 "우당 이회영 가문 5형제 등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고문으로 사망하고, 다섯째 성재 이시영만 살아서 해방 후 귀국하는데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백범 김구와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며 "지금 남산에 백범 김구 동상과 성재 이시영 동상이 같이 들어선 건 이시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백범하고 성재하고 화해하라고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분명한 사실"
"항일투쟁가,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보면 긍지가 없어요. 어떤 분들은 자기 할아버지가 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도 몰라요. 자기가 항일투쟁한 사실이 후손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말하지 않고 쉬쉬하는 거예요. 실제로 피해를 보니까. 그런 피해 의식이 깔린 거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 투쟁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학생 질문에 정 교수는 "그 말이 조금 과장됐지만 분명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그는 "의병에서 광복군까지 투쟁하신 분들 후손의 실태가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며 "정부가 '너희들은 너희가 알아서 먹고 살아라'는 식으로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친일파가 단순히 돈이 많아서 흥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지금까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이라며 "항일투쟁을 하면 3대가 망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교육이었기 때문에 너무 늦었지만 항일 명가의 후손들이 삶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든든한 교육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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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도 모르는 독립운동가... 항일은 미친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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