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 특히 생리에 대해 말하는 걸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생리를 한다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폐경을 겪고, 폐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부분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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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약간의 동정심은 발휘되어서 불편하다는 말은 안 하지만, 폐경도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되거나 조롱거리가 되어버리곤 한다. 요즘은 좀 예민한 사람에게 "갱년기야?"라고 하는 농담을 들어도 웃어지지가 않는다.
폐경, 갱년기라는 것이 직접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영역이어서 밖에서 이해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그러다 보니 그 일이 내 일이 되면 전에 없이 허둥거리게 된다.
작년, 막연하게 공포스럽고 무서웠던 폐경이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고 분명 징조가 있었음에도 그 심각성에 대해 몰라서 무책임하게 보내고) 닥쳤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응급조치로 취한 방법이 호르몬제다. 약 덕분에 몸이 제 상태로 돌아오자 마음이 풀어졌다. 처음에는 호르몬제를 끊기 전까지 일단 내 몸 상태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놓자는 게 목표였다.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러나 지난 1년 호르몬제 덕분에 컨디션을 회복한 나는, 관성처럼 내 몸보다는 일에 더 매진하는 엉뚱한 짓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어쩌다 문득 '이 유예기간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언젠가'라는 불명확한 설정 기간을 핑계로 내 몸, 내 건강에 대한 계획도 정처 없이 유예되었다.
시한폭탄 같았던 문제는 건강검진을 받고 나서 터져버렸다. 호르몬제를 복용하기 전에, 의사로부터 호르몬제를 복용할 경우 자궁의 혹이 커질 수도 있다고 주의를 들었고, 6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받는다는 조건 하에 치료를 시작한 터였다.
그런데 얼마 전 건강검진 때 혹이 커져서 호르몬제를 중단해야 할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써 유예기간이 강제 종료되었다. 동시에 폐경이 되기 전 육체적, 정신적으로 겪었던 고통이 다시 진격했다. 또다시 허둥거리고 있을 때 <중년, 잠시 멈춤>이라는 책을 만났다.
"엄격히 생리적인 면에서 볼 때, 폐경기에는 신체 구조와 세포 기능에서 사춘기 이후 보이지 않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난자가 모두 고갈되어 난소의 기능이 정지되고, 아무리 호르몬을 분비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을 때, 몸 안에서 폭발적인 연쇄 반응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점부터 변화가 가속화된다. 생리 주기를 보장하는 난자가 모두 없어지면, 에스트라디올 분비가 극적으로 감소하고, 테스토스테론 생성 역시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줄어든다. (중략) 에스트라디올이 없으면 우리 몸은 사실상 트라우마 상태에 빠진다. 일과성 열감에서 불안정한 지방대사, 난소 위축, 골밀도 감소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으로, 단기적으로 증상이 뒤따른다. 한편 테스토스테론 결핍은 심한 감정 기복, 우울증, 정력 쇠퇴, 성욕 감소 등을 초래한다. 이런 변화들이 갑자기 촉발되면 주기적으로 상실에 대한 불안감에 빠지게 되고, 불안감에 사로잡히면 자아의식이 점차 손상되면서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 <중년, 잠시 멈춤>
갑자기 내 젊음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의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다. 허둥댈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문자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내 생각엔 정신적 폐경이 더 힘든 것 같아. 학교, 직업, 집, 아이들, 심지어 중요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여태껏 내가 선택해온 모든 것에 대해 갑자기 다시 생각하게 되고 바꾸고 싶어지니까.' 그 친구는 인생의 후반기로 접어들자마자 갑자기 세상이 후진 기어로 바뀌면서 자신이 인생 전반기에 이룬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는 것 같다며, 중년이란 나이의 대담한 공격에 비틀거렸다." - <중년, 잠시 멈춤>
50을 앞둔 저자의 갱년기 경험담은 딱 내 이야기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젖은 먼지처럼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던 것이 바로 다 부질없음과 후회였으니까. 내 경험과 살아온 시간들은 비롯해 관계까지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리셋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서 자격증 공부에 더 매달리기도 했다.
결국 시험에도 떨어지고, 호르몬제를 끊고 다시 갱년기와 폐경 앞에 멈춰 선 지금. 나는 어린 날 경험한 초경 때를 기억한다. 비록 낯선 곳에서 맞이했지만, 나의 초경을 축하해 주었던 엄마의 격려도 함께 떠오른다. 그때의 소녀가 이제 중년이 되어 폐경을 맞고 있다. 꽃의 핌과 짐은 어쩌면 같은 말 아닐까. 이제 꽃이 지는 폐경을 앞두고 나 자신은 물론, 폐경을 맞는 모든 사람을 꽃이 필 때처럼 축하하며 격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