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살인사건 당일(10월 24일) 오전 모바일메신저 카카오톡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눈 대화 내용의 일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내 요구사항, 딱 2개 말할게”라고 말했지만, 가해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오늘 (춘천) 집으로 와줄래?”라고 요청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가해자가 처음부터 피해자를 춘천으로 불러들여 죽일 생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오마이뉴스
사건 당일(10월 24일) 오전 7시 55분. A는 출근길에 모바일메신저 카카오톡으로 B에게 "내 요구사항, 딱 2개 말할게"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A는 전날 어머니와 상의한 대로 ▲ 서울의 회사는 계속 다니겠다 ▲ 서울 근교에 신혼집을 얻자는 얘기를 꺼낼 참이었다.
이상한 점은 B의 반응이었다. 32분 뒤 그는 "오늘 (춘천) 집으로 와줄래?"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의 거주지가 멀어서 주말을 이용해서 틈틈이 만난 점을 감안하면, 평일에 퇴근 후 춘천까지 와달라는 것은 이례적인 요구였다. 결혼이 지상과제였던 B가 A가 말하려는 요구사항 2개를 듣기도 전에 무조건 춘천까지 와달라고 한 점도 의아한 대목이다.
B는 A가 퇴근을 1시간 앞둔 오후 5시부터는 한층 집요하게 '춘천행'을 종용했다. 심지어 "오빠, 남양주 사는 거 찬성했다"며 A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하는 듯한 말까지 하며 그를 회유했다.
6시 12분경 회사를 나선 A는 결국 춘천행을 택했다. 그로부터 2시간 뒤 아버지에게 춘천에 도착했음을 확인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A는 세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혹시나' 하는 예감에 경찰에 A의 위치추적 서비스를 의뢰한 와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B의 어머니였다. 그는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어조로 비보를 전했다.
"어떡해요, 어떡해요, A가 죽었어요."
A의 사망 추정 시각은 10월 24일 오후 9시 30분.
수사 결과에 따르면, B는 범행 직후 식당 부엌의 흉기로 A의 시신을 여러 차례 훼손했다. 또 새 옷을 갈아입은 뒤 식당을 빠져나오면서 여동생과 전화 통화를 한 뒤 차량으로 10분 거리의 교회로 도주했으나 사건 당일 경찰에 체포됐다. B는 경찰에서 "결혼 문제로 다툰 끝에 우발적으로 A를 살해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전해졌다.
거짓이었던 사람
그리고 B의 숨겨진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A에게 접근하면서 'K대 동문'이라고 소개했던 것과 달리 B는 K대를 졸업하지 않았고, K대 부속 교육기관에 다녔다. 심지어 가족들이 B의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할 정도로 그의 이중생활은 감쪽같았다.
A가 요구하지도 않은 결혼계획서를 B가 작성해 보여준 것도 지금에 와서는 그의 기행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될 대목이다.
A의 어머니는 "딸이 들고온 결혼계획서라는 게 너무 꼼꼼해서 그때만 해도 '요즘 젊은이들이 똑똑하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속으로 켕기는 게 있으니 거짓말도 정교한 게 아닌가 싶다. '태양광 시설을 2기 만들면 1년에 5000만 원 번다'는 얘기도 다 허언"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A의 장례를 치를 때까지도 뭐가 뭔지 모르는 혼돈 속을 헤맸다. 생전 A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담긴 스마트폰은 경찰이 수사 착수와 함께 가져갔다. 경찰은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때까지도 언론 브리핑 한 번 하지 않았다. 사건 초기 경찰발로 단편적으로 나오는 뉴스들은 유족들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그나마 사건 당일 A와 B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알게 된 과정은 A의 가족에게는 작은 기적의 체험으로 다가온다.
"A가 쓰던 노트북 컴퓨터에 PC용 카카오톡 메신저가 깔려있는데, 암호를 모르니 열 수가 없었다. 군 복무 중인 A의 동생이 휴가를 나와서 (10월 27일에) 이것저것 만지다가 우연히 계정을 열었다. 사건 당일 둘의 대화 내용이 남아있는데, 경찰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정보였다. 이 대화 내용만 봐도 계획범죄가 맞는데, 우발범죄로 결론 날까봐 세상에 알리기로 한 거다."(A의 어머니)
유족들이 대화 내용을 백업한 뒤 PC 메신저를 다시 열려고 했지만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A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하늘나라로 먼저 간 딸이 너무 억울하니까 잠깐 돌아와서 열어주고 갔나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건은 이미 검찰로 넘어갔고, 가해자의 자백과 흉기 등의 증거가 명백한 상황에서 B가 유죄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약물 복용 전력이 없는 B가 심신미약 등을 이유로 죄를 경감 받을 가능성도 극히 희박하다. 검찰도 '계획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기소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랑'은 변명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A의 유족이 언론사 기자를 만나 자신들의 사정을 호소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A의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당장 딸자식 잃은 슬픔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지나가는 말로 한두 마디 툭툭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댓글 읽을 시간도 없는데, 친지들이 '혼수 문제로 다퉜다'는 식의 댓글들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줬다.
생전의 A와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그나마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우리 가족 중에 나밖에 없다. 나도 회사를 다니는 사람인데, 그동안 앓아누워버렸다. 그런데 나까지 무너지면 아무도 못 챙길 것 같아서 억지로 밥숟가락 몇 번 뜨고, 그 힘으로 이렇게 언론사 기자를 만나고 있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간 날(10월 31일)에는 유족들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글도 올렸다(☞
청와대 국민청원 바로가기 http://omn.kr/1cqbp).
"살인마가 사회와 영원히 격리조치 될 수 있도록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요구를 담은 글에는 8일 현재 13만 7000명이 호응했다. 정부의 공식 답변을 요구할 수 있는 기준선(20만 명 이상)에 2/3까지는 온 셈이다.
유족이 한 가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6일 국무회의에서 이 사건 등을 언급하며 "강력범죄가 아동, 노인, 장애인, 여성 같은 약자에게 자행되면 현행법 체계 안에서라도 더 무겁게 처벌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했고,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8일 정부와 경찰 등에 흉악범죄에 대한 총력 대응을 호소했다.
"정부의 공식 답변을 이끌어낼 정도는 돼야 딸을 죽인 범인에 대한 엄벌을 받을 정도로 여론이 움직이지 않겠냐"는 게 유족들의 생각이다.
딸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합의요? 선처요?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B가 경찰에 '사랑해서 그랬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했다면 너도 평생 감방에 있다가 죽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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